A. 화살의 비유
화살을 쏠 수 없는 경우에는,
화살의 과녘이 있네, 없네 하는 것도,
맞은 것이 있네, 없네 하는 것도,
다들 헛소리가 아니면 무엇일꼬?
오로지 화살을 쏠 수 있는 경우에만,
과녘이 있네 없네 & 맞춘 것이 있네 없네 하는 것에,
생각도,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화살도 쏠 의지(Saṅkhāra)조차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생각(Viññana)도 들 여지가 없지 않겠는가!
B. 이도 저도 아닌.
모름으로 '참작'하여 경외할 순 있겠지만,
가리킨다 한들 가리켜 질 바 없으니,
있다/없다로는 가늠할 바가 없다;
있다/없다는 찝히는 순간, 분별이다.
찝히는, 멸하는 찰나에도 그저 '참작'만 할 뿐,
찝히기 전, 멸한 후에는 '참작'조차 할 수 없으니,
여하한 형용도 허락되지 않는다;
살고, 겪는 어느 순간 순간 확연할 바가 있으나,
가리켜 명명하는 순간 사라져 껍데기만 남는다.
하여, 무어라 칭한들, 그저 말문만 막할 뿐.
C. 한계의 정식화들
가르킬 수 없음(what is not)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what must not be).
가르킬 수 있음(what is)만을 말해야 한다(what must be).
가르킬 수 있음에 '있다/없다'가 가능한 것이다.
가리킬 수 없음에 존재 유무 거론, 말인즉,
있음/없음의 가리킬 수 없음에 대한 투사는 망상의 시작이다:
투사된 것과 투사되기 전 것의 비교가 가능하다 우겨댄다;
가리킬 수도 없는 데 투사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재현의 사용을 정당화 한다: 사기의 기초다: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최고의> 발명품이다.
실상은 언제나 '목하 애쓰기(sati)' 이상이 아니다:
삶의 시작이자, 중심이자 그리고 끝이 함께 한다.
모든 형이상학의 뱃속이 까뒤집히는 '때, 곳'이다.
D. 수행의 중요성
붓다가 왜 십사무기에 답하지 않았는지는,
그 십사무기가 형이상학의 내용들임을,
존재론이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이해했다면, 빤야의 이해 또한 가능하리라.
수행이 깊어지고 닙빠나에 이르면,
확연해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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