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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수정한 것

인지의 바이어빌러티(viability of cognition)

1.

‘적응(adaption)’과 ‘적응된(adapted)’은 자주 오해되며(2장을 보라), ‘적합(適切)한(adequate)’은 공리주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기에, 나는 생물학 용어 ‘<viability>’를 선택했다. 행위, 개념, 그리고 개념 형성 조작들은 이것들이 쓰이는 목적한 바나 기술하는 맥락에 맞아들면 <바이어블, 즉, 독자적으로 살아남아 발달/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구성론적 생각하기 방식에서, 경험 영역에서 <바이어빌러티> 개념은 진리, 말인즉 실재의 ‘정확한’ 재현(表象)을 가리키는 전통 철학자들의 개념을 대체한다. 이러한 바꿔치기는, 분명코, 앞선 경험의 신뢰할 만한 반복 또는 그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술(記述)을 수반하는 일상의 진리/진실 개념을 침범하지 않는다. 

 

 

2.

칼 포퍼(1968)는, 과학의 도구주의적 시각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이어 그 시각이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알아차릴 그의 반박의 최종적 기반이란, 그저 <과학적 이론은 ‘주어진 상황에서 도구로서 바이어빌러티를 갖는 수준’ 너머에 있는 옳음(‘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라는 그의 형이상학적 신념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신념의 초석들이란, 그의 개념들, 반증가능성과 결정적 검사다.

.....

이것이 바로 차이이다. RC는 거리낌 없는 도구주의다. RC는 (독립된 실재에 대한 참된 재현(表象)으로서) ‘진리’ 개념을 주체의 경험 세상 내 ‘바이어빌러티’ 개념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RC는 모든 형이상학적 책무를 거절하며, 살기(生活) 주체들로 우리가 구성한 세계, 우리가 알게 될 유일한 세상에 관한 가능한 하나의 모델 이상일 수 없음을 주장한다. 처음 접한 경우 RC는 어렵고 태도에 대한 충격적 변화이기에, 내 한번 더 반복하고 싶은 건, RC는 형이상학적 추측이 아닌 단지 사용함으로써만 가치가 가늠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로 의도된 것이기에, 그것의 진위(眞僞)을 묻는 것은 어긋난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점이다. 

 

 

 

3.

그런데, 더 근본적 논리적 결함이 진화론적 인식론의 전제들에 있다. 로렌츠 쓰기를, ‘주어진 환경 조건에 적응은 그 조건에 관한 정보 획득과 동등한 것이다’(1979, p.167). 이게 그의 학파의 주된 단정(斷定)이지만, 정당화될 수 없다. 적합(fitness) 또는 바이어빌러티와 같은 생물학 개념에서, 유기체나 종들은 각기 ‘부여된’ 환경에 관한 정보을 소지할 또는 그 환경과 속성들을 공유할 필요가 없다. 적응에 요구되는 것은, 유기체들이 긁히거나 충돌하는 지점들을 피하는 것뿐이다. 자연 선택의 체(sieve)를 통과한 그 어떤 것도 자신이 걸러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는 있지만, 이에는 그 체의 구조와 관련된 여하한 지시도 없다. 진화론과 구성론 모두에서, ‘맞아들다(適)’는, 거기 있었을 여하한 제약들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4.

초기에 속하는 이 책이 보여주려 한 것은, 인간 젖먹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들이 경험하는 실재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실재를 우리가 독립된 것으로 전제(當然視)하든 안하든, 실상, 그들은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이 책은 특정 유아의 실재 구성을, 엄마, 아빠, 곰 인형, 그리고 요강으로 상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개체 실재의 핵심 구조를 이루는 기초 개념들이, 그 같은 구조 자체가 실존한다는 전제(當然視) 없이, 쌓아올리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삐아제 이론의 주춧돌이자, 모든 전통 지식 이론들과 삐아제 이론 사이 가장 중요한 차이다. 그의 격언, ‘지식은 상위(上位)의 적응 형식이다’의 직접적 귀결로, 인지를 존재론적 실재에 대한 재현(表象) 산출자로 보는 생각을 버리고, 인지를, 그 대신, ‘바이어블’할 개념–구조들 구성을 목적으로 하는, 적응 도구로 생각했다.

 

 

5.

배우기와 그것이 창조한 지식은, 이렇게, 명백히 도구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삐아제 해석하기에 있어 서두르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그의 인지이론은 두 종류의 ‘바이어빌러티(viability)’를 수반하며, 따라서 쌍층적 도구주의이다. 감각운동 수준에서 ‘바이어블’한 행위 스킴들의 도구로서 역할은, 유기체들이 그들 경험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감각평형 그리고 생존과 같은 그들 목표들>을 성취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또 한편, 반성적 추상 수준에서 조작적 스킴들의 도구로서 역할은, 유기체들이 그들 경험의 현 지점에서 ‘바이어블’한 것들로 판명된 생각하기뿐만 아니라 행하기 경로들까지 보여주는 <구조들로 조성된 비교적 일관된 개념적 네트워크>를 획득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이러한 상위의 한층 포괄적인 추상 수준에서 개념들의 바이어빌러티를 가늠하는 기준은, 그것들의 실용적 가치가 아니라, <가능한 최대의 개념적 네트워크에 그 개념들이 무모순적으로 맞아들고 있는가> 여부다. 이러한 면은 구성주의가 과학의 관행을 침식한다는 잦은 불평을 잠재울 것이다. 이 두 번째 수준에서 바이어빌러티의 최우선적 핵심 기준은, 실상,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한 일관성 이론’이라 불렀던 것과 유사하다: 이 이론은 개념적 양립-가능성을 문제로 삼는다. 게다가, 과학이나 철학 모델들에서처럼, 다른 기준들, 다루기 용이함, 경제성, 단순성, 또는 수학자들의 ‘엘레강스[elegance: 멋진 또는 매력적인 스타일 또는 양식을 갖춘 상태] ’와 같은 기준들은, 같은 여건에서 ‘바이어블’한 것으로 동등하게 증명된 모델이나 이론들을 고를 때 사용될 수 있다.

 

첫 번째 도구성(道具性)의 종류는 (관대한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경멸해왔던) ‘공리적(utilitarian)’이라고 불릴 수 있다; 두 번째, 개념적 일관성을 문제시하는 도구성은, 엄밀히 인식론적이며, 자체로 철학적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후자의 도구성은 지식 구상에 있어 근본적 전환을, 말인즉, 다다를 수 없는 존재론적 검사를 요청하는 ‘진리(Truth)’라는 역설적 구상을 제거하는 전환을 재차 강조한다.

 

존재론적 실재와 대응 대신 경험 세계의 바이어빌러티를 채택하는 조치는, 귀납적 추론과 일반화들로 얻어진 지식에도 적용된다. 이는 논리학과 수학의 연역적 추론들에는 여하한 영향도 주지 않는다. 삐아제 조망에서, 이들 연역 영역에서 결론들의 확실성은, 감각운동 수준 스킴들의 결과가 아닌 심적 조작에 속하는 것이다 (Beth and Piaget 1961; Glasersfeld, 1985를 보라). 

개념 배우기와 관련해, 나는 거의 논해지지 않는 특징 하나를 강조하고 싶다. 경험 요소들이 재연되며, 실제 경험한 적이 없는 가설-상황 형성을 위해 일단 결합될 수만 있다면, 온갖 류의 사고 실험을 해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실험은, <내가 이거나 저걸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와 같은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될 수 있다. 게다가, 사고 실험은 물리학과 수학의 가장 정교한 추상적 문제들을 숙고할 수도 있다. 그것들의 결과가 응용되어 실제 ‘바이어블’한 성과들을 끌어낼 수 있는 한, 사고 실험은 인지 영역에서 필시 가장 강력할 배우기 절차를 구성한다.

 

 

 

6.

http://www.cysys.pe.kr/zbxe/RRC/board_9/324521 경험의 실재성에서,

 

이와 같이, 과학적 지식이 상식적 지식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달리 구축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구축 방식이 명시적이며 반복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는 우리 시대 최고 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폴 발레리는, ‘과학이란 언제나 작동하는 일단의 사용설명서와 절차들이다’라고 적고, 이어 설명했다: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전적으로, 잘 정의된 일정 동작들로 특정 현상을 재생산할 혹은 다시 볼 것이라는 확실성에 기댄 것이다. (Valéry, 1957, p.1253)

 

그래서, 과학적 지식의 가치는 철학자들의 의미로서 ‘진리(眞理)’가 아닌 ‘바이어빌러티(1장, 19p 참조)’에 기대 가늠된다. 

(그림과 그것이 재현코자 한 것 사이 맞서는(즉, 공유하는) 점과 특징들을 요청하는) 진리(truth)라는 생각과는 달리, (행위들과 생각하기 방식들에 적용되는) 바이어빌러티(viability)라는 생각은 그저 맞아들기(適)만을 요청할 뿐이다. 그러한 공유점들이란 마찰 혹은 충돌의 지점들일 것이기에, 바이어빌러티는 그러한 점들의 부재(不在)로 특징지어진 관계다 (2장을 보라)

그럼에도, 바이어빌러티 개념에는 선정된 목표들에 이르려는 유기체의 방식을 방해, 가로막는 장애과 제약들이 있고 또한 있을 것이라는 점이 함축되어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Anything goes)’는 단연코 실상이 아니다. 본원적(ontic) 실재가 우리 행위들 일부를 방해하며 우리 노력들 일부를 헛되이 만들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상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존재적 실재는 오로지 우리의 행하기 <그리고/또는> 생각하기의 실패들 가운데서만 자신을 현시할 것이며, 우리는 성공치 못한 행위와 생각들에 대한 용어들이 아니라면 이러한 실재를 묘사할 그 어떤 방식도 갖고 있지 않다.

 

 

 

 

타자들을 통한 확증

 

물정(物情)을 알고 갖춘 이러한 수준에 이르면, 이들 ‘타자들’을 설명하고, 예측하고, 그리고 제어하려는 데 엄청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경험장(經驗場)에, 계속해서, 타자 모델들, <움직이고, 지각하고, 계획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그리고 철학적 사색까지 하는 타자들, 그 자신이 경험에서 스스로 추상했던 개념, 스킴, 그리고 규칙들과 같은 종류들을 귀속시킨 타자들>에 대한 모델들이 거주토록 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들 모델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당수 지식은 우리 자신이 자신들의 경험을 다루면서 찾아냈던 ‘바이어블’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이들 타자들 가운데 특정 인물이 특정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측할 때, 그 예측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한테 귀속시켰던 특정 지식 조각이다. 만약, 그때, 그 타자가 우리 예측대로 행한다면, 그 지식 조각은 우리 자신의 행위 구역에서 뿐만 아니라 그 타자의 행위 구역에서도 ‘바이어블’한 것으로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그 타자가 지니고 그에 맞게 행하는 것으로 우리가 전제(當然視)했던 지식과 추리에는 2차 바이어빌러티가 부여된다. 

 

이러한 종류의 확증(確證)에 대한 가치 평가에서 결정적인 것은, 그 개체의 그밖에 구성하기 에이전트들에 대한 구성이 우리가 우리 경험 세상에 갖추는 물리적 대상들의 구성보다도 더욱 자유롭지 <즉, 맘(意志)대로 되지> 않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한 타자들 구성은, 계속해서 훼방 받으며, 그렇기에, 방향 잡혀지지만, 그렇다고, 제약들로 기능하는 장애들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명백한 것은, 우리가 개체로서 우리 경험장 너머 타자들의 경험장으로 뻗어가고 있는 것으로서, 상당한 정당성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2차 바이어빌러티는, 우리 경험적-실재의 안정화와 견고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그러한 2차 바이어빌러티의 도움으로 창조되는 상호주관적 수준에서는, 타자들이 개념, 행위-스킴, 목표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느낌과 감정(情緖)들까지도 공유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 고로, 오로지 홀로 경험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실재하는(진짜인) 것들로 믿게 된다. 그러한 수준에서, 우리는 ‘사회’,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상식’에 대한 ‘확증된 사실들’에 대해 말하면서 정당화시켰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언어적 커뮤니케이션

 

단어 ‘컵’과 연합된 재연이 이 단어를 쓰는 언어 화자들의 수많은 방식들에 대체로나마 맞아 들어가기 위한 조정을 끝마칠 때까지 아이는 수없이 좌절된 언어적 상호작용들과 그 자신의 의미에 대한 반복된 잘라내기와 덧붙이기를 시행할 것이다. 어른들로서 우리는 ‘바이어블’한 ‘컵’의 의미를 다기한 맥락들, 이를테면, 축구선수권대회, 속옷, 집합, 골프장, 엉덩이나 어깨의 해부구조, 등등에서 스스로 구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더듬거리기, 짐작하기, 그리고 수정하기가 필요했는지를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단어와 언어적 표현들의 의미 조율과 조정 과정은 우리들 각자에 걸맞게 우리 사는 내내 계속된다. 특정 언어를 얼마나 오랫동안 말해왔는가 하는 바와 상관없이, 우리한테는, <우리가 단어를 어떤 특정 측면에서는 독특한 자신만의 것으로 판명된 방식으로 사용했고 사용하고 있음>을 깨닫는 계기들은 변함없이 있을 것이다.

 

언어적 의미 구성에서 이러한 핵심적이며 불가피한 주관성을 보게 될 경우, 이제 더 이상, <단어들이 생각(觀念)이나 지식을 나른다는, 우리가 말한 걸 이해하는 청자는 필히 우리 것과 동일한 개념적[개념-형성] 구조들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은 지속될 수가 없다. 대신, 우리는 이해하기란 일치(一致)나 필적(匹敵)이기보다는 들어맞기(適)나 조화(調和)의 문제임을 깨닫는다. 경험 맥락에 맞아 들어가는 기능으로서 바이어빌러티 개념은, 진화론과 인식론에서만큼이나 언어적 커뮤니케이션(疏通) 영역에서도 유용하다.

 

 

 

자아-개념

 

1.

구성론적 조망에서, <우리가 구상하는, 몸을 포함한, 자아>는 비트겐쉬타인이 세계(世界)의 일부가 아닌 ‘나’라 칭했던 능동적 에이전트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 자아>의 여타 세속적(世俗的)인 부분이 구축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 자아가 경험한 바이어빌러티에 따라 가늠된다.

 

복잡한 자아 개념에 대한 ‘바이어블’한 분석을 방해했던 가장 심각한 장애는, 필시, <경험 주체와 그것이 경험하는 대상 사이 이분법을 유기체와 그것의 환경 사이 이분법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는 전통적 전제(當然視)일 것이다.

 

 

2.

여타 모든 구성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든 타자 ‘모델들’ 역시 우리 경험에서 ‘바이어블’한 것들로 판명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들은 버려져야 한다.

 

우리의 여타 개인들에 대한 구성이 이러한 바이어빌러티에 의존한다는 점은, 여타 합리적 지식이론들과 마찬가지로 구성론에서도 흐릿한 영역, 윤리, 그 방향으로 이끄는 귀결을 하나 갖고 있다. 그 영역이 불명료함에도, 개체가 생각하기와 행하기 방식들의 상호주관적 바이어빌러티를 확립하려면 타자들의 확증이 필요 하다는 사실에는, 자율적 구성자로서 타자들에 대한 염려/배려가 수반된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우리 생각에 따르도록 강제할 경우, 우리는 그들을 확증 제공자로서는 실상(ipso facto) 무력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칸트의 ‘실천 명법(practical imperative)’의 또 다른 정식이다:

 

당신 자신만이 아닌 타자들한테도 있는 인간성을 결단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루는 방식으로 항상 행하라. (Kant, 1785, p.429) 

 

생각하기 존재들은, 그의 설명으로, 그들 각자의 목적(存在-理由)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다른 여하한 목적으로도 교체되면 안 된다 (ibid., p.428). 엄밀히 말해, 이는 ‘윤리적’ 준칙이 아닌 윤리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 이 조건으로 주장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배려해야 하며, 그들을 대상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모든 윤리 철학들은 암묵적으로 이러한 전제(當然視)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구성론은 그 기본적 이유를 최소한 하나는 제공한다. 이러한 조망에서, 개체로서 주체한테 생각하기와 행하기의 상호주관적 바이어빌러티를 확립하기 위한 여타 다른 사람들의 필요(必要)란, 그러한 타자들에 대해 조마조마(念慮/配慮)하는 마음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타자들이 배려되어야 하는 까닭은, 더욱 견고한 경험적-실재(現實) 구성에 있어 그 무엇도 그들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체로는 여하한 윤리–준칙도 구성하지 않지만, 윤리 발달을 위한 합리적 기초 하나를 주고 있다. 내 강조하는 바, 행위나 사고 스킴들의 바이어빌러티는 언제나 특정 목표들과 관련되어 가늠되기에, 윤리[ethics: 한 개인의 행동을 제어하는 도덕적 ‘원리(準則)들 또는 원리들의 체계’] 자체는 정말이지 실제로 이러한 바이어빌러티에 기초할 수는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윤리가 반드시 그 자신을 현시해야 하는 곳은 바로 목표들 선택하기에서다.

 

 

3.

 

경험적(實驗觀察的) 사실들은, 구성론적 조망에서 보자면, 주체 경험의 규칙성들에 기반한 구성물들이다. 그것들은, 목표들이 추구되는 과정에서, 그들 유용성을 유지하며 그들 존재-이유(目的)를 달성하는 경우에, ‘바이어블’한 것들이다.

 

경험을 조직, 체계화 하는 과정에서, 주체는 <독립된 실존 속성을 부여한> 대상(對象)들만이 아니라, <그/그녀 자신의 경험에 주어진 그와 같은 구상 가능한 지위와 깜냥들을 귀속시킨> 타자(他者)들 역시 창조한다.

 

지식이 문제되는 영역에서, 개체로서 주체가 ‘바이어블’한 것으로 찾아낸 개념, 이론, 신념들, 그리고 여타 추상 구조들은, 이러한 지식 사용을 타자들한테 귀속시켜 예측에 성공할 때, 고차적 바이어빌러티를 획득한다. 그러한 추가된 바이어빌러티는 상호주관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객관성에 대한 구성론자의 대체물이다. 이것에 함축된 의미는, 오직 ‘바이어블’한 타자들만이 그 주체의 경험적-실재(現實)에 대한 최고 수준의 지지대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개체한테는 타자들을 구성할 필요와 이들 모델을, 할 수 있는 한, ‘바이어블’하게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자아 개념과 관련해, - 실험관찰적(經驗的) 인식론으로서 - 구성론은 경험적 자아 구성을 위한 대체로 ‘바이어블’한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구성을 조작하는 에이전트로서 자아, 주관적 알아차림의 중심(核)으로서 자아는, 형이상학적 전제(當然視)로 보이며, 실험관찰적 구성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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