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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의 법칙들 - 입문

형식의 법칙들 - 입문

입문


이 에세이의 주된 의도는 논리 대수로 알려진 것을 논리학에서 떼어내 수학의 일원으로 재배치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울이라고 불렸던 그 같은 대수들이 신비롭게 보이는 것은, 그 속성들에 대한 서술들이 현재 수학적으로 대수 산술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흥미도 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수는 각기 산술을 갖고 있지만, Boole은 그의 대수를 논리학에 들어맞게 디자인했습니다. 그의 대수는 논리학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해석이지, 논리학의 산술은 분명코 아닙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후 저자들은 Boole을 모방했습니다. 그 결과, Boole의 이름을 걸고 현재 매일 쓰고 있는 대수의 일차, 비수치적 산술을 명료하게 할, 지지받는, 연구는 이제껏 시도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략 7년 전 쯤, 그 같은 연구가 필요한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그럼으로써 내 자신이, 수학적으로 말해, 전인미답의 기반(基盤)에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빠뜨린 원리들을 찾기 위해 나는 그 속을 깊이 탐색해야 했습니다. 그 원리들은, 우리가 이내 보게 될 것들로, 굉장히 심원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서술하면서, 나는 특별한 모든 항들이 그 맥락으로 정의되거나 명백해질 수 있도록 쓰고자 노력했습니다. 나는 독자의 입장에 서서 오로지 영어와 세기(counting)에 대한 지식, 그리고 수(數)들이 통상 재현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만을 당연한 것으로 가정했습니다. 이 텍스트에 딸린 여기 입문에서 그리고 주석들과 부록들에서는 다소 전문적으로 쓰는 자유를 누렸지만, 그 주제가 그와 같은 일반적 관심사이기에 여기에서조차 비전공자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한, 서술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불 대수들에 대한 서술은 지금까지는 공리 집합들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공리를 증거 없이 받아들인 진술로 여길 수 있는 것은, 그 공리가 어찌어찌 믿기 수월해진 여타 진술들을연역할 수 있는 그 같은 진술들의 집합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진술들을 항상 식별케 했던 주된 특징은 진리의 자발적 발현의 거의 전적인 결핍이었습니다. 이를테면, Sheffer의 방정식들이 수학적으로 명백하다고(evident)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 것은, 그 증거(evidence)라는 것이 그것들에서 나오는 방정식들이 쓸모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에세이에서 전개된 일차 산술에서, 원시 방정식들은 매우 단순한 두 개의 지시 법칙들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 법칙들의 자명성(nature of self-evidence)에 대한 우리 견해들이 어떤 것이든, 그것들은 적어도 상식의 결과와 부합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최초로 명백히 Sheffer 공리들 각각에 대한 증명들을, 따라서 모든 불 공리들에 대한 증명들을 <수학의 기초를 이루는 지반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공리계에 관한 정리들로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부록1).

작업이 이러한 토대를 다루는 것들에서 벗어나면,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것처럼, 수학적 소통의 일반 형식은 그것을 적는 사람에 따라 더해지며 아주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확정된 시스템을 갖게 되면, 그 부분들에 이름을 주고, 많은 경우 이름을 재현하기 위해 각각 상징을 채택합니다. 이를 행하는 가운데, 표현 형식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필히 불려지며, 처음에는 기껏해야 완비된 가능성 영역에 비교적 별 형식없이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보이던 <정리들의 증명들>은, 우리의 최초 착상들이 진행됨에 따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점점 더 에두르며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중간 쯤에 이르자, 대수가, 자신의 모든 재현을 완비한 채, 은연 중 산술에서 성장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가 이를 파고들려 할 즈음 우리는 이미 그것의 형식적 조건들과 그것의 가능성들을, 그와 같이 기술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시(提示) 형식의 장점들 가운데 하나는, 상식으로부터 명백한 이탈 없이 수학적 개념들과 공통 절차 형식들을 점차적으로 쌓아올리는 데에 있습니다. 수학 분과는 세계 구조에 대한 우리의 내적 지식을 드러내는, 여타 분과들과 비교해서, 강력한 방식이자, 이를 우리한테 공통된 오직 추리와 계산 능력만을 결합해서 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 해도, 수학적 관습들과 정식화들의 매단계 순차적 발달은 그 역(逆) 방향의 문제들 없이는 있을 수 없었었습니다. 테크닉들의 기원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들 전체를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수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은, 이미 입증된 수학적 도구들만을 쓰는 관념 전개가 필수였던 제시된 초기 부분을 마주한 자신이 곤란에 처해 있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우들 가운데 몇몇에서, 오로지 이미 전개된 절차들과 테크닉들에만 맞아떨어지는 개념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지점에서 최대로 우아한 논증은 개념적으로는 추적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2장에서 생기는 그와 같은 경우로는 지시 계산에 대한 원시 방정식 두 개 가운데 두 번째 방정식의 유도가 그에 해당됩니다. 이 지점에서는 그 논증을 추적하기에는 그와 같이 전반적으로 어려울 것 같아서, 이 텍스트 말미에 2장의 주석들에서 세련된 바에는 못미치지만 그것을 다시 진술했습니다. 이를 마무리하고 나면, 그 논증은 수학적으로 거의 시시할 정도로 단순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억기(憶起)해야 할 것으로, 그 어떤 원리도, 해당 텍스트의 엄격한 절차에 따라, 그 ‘존재’가 불리고/宣言되고 나서야 또는 이미 채택된 그밖에 원리들에 입각해 정당화되고 나서야 쓰일 수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경우에야, 논증을 우리는 늘상 쓰는 치환(置換)으로 쉽게 만듭니다. 하지만, 두 번째 원시 방정식의 정식화가 필요해지는 이 에세이의 그 단계에서, 그 어떤 치환 원리도 아직 그 ‘존재’가 불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가 이 에세이에서 이후 발견하는 “치환 원리의 사용과 정당화”는 우리가 확립하길 원하는 바로 그 방정식의 실존에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록 2에서는, 일차 대수를 논리 대수로 써서 단순하게 만들 수 있는 몇 가지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원시 명제(primitive proposition)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할 경우 여타 논리 대수들을 인정하지 않을, 산술에 접근할, 기본 자유가 우리한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Whitehead와 Russel의 5개 원시 함의(含意)들[2, pp 96-7] 각각은 수학적으로는 하나의 상수와 동등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그 상수가, 명제라면, 원시 함의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산술일 경우, 그 상수는 명제를 재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흥미를 끄는 점은, 변수 관념은 유독 연산 상수 관념에서만 발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상과 무관한 산술 방정식이든, 규정된 장소들에서 이러한 상수든, 그 형식을 고려하는 우리 능력을 대수가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울러, 일차 산술에서, 두 종류의 상수, 5, 6, 등등과 +, -, 등등은 분명 제시되지 않는 반면 각기 속성들을 갖는 유사 상수들로 만들어진 표현들은 명확히 제시되고 있기에, 변수 구상은 이러한 속성과 무관한 현존 또는 이러한 속성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바는 Wittgenstein이 제안했던 다음 견해를 지지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실상 명제 계산에서 변수들이 표현에서 명제들이 아니라 유독 그 명제들의 진리-기능들만을 재현하는 까닭은, 명제 자체가 주어진 속성의 단순한 현존 또는 부재와 동등할 수 없기에 하지만 그 명제의 존재가 참이냐 아니냐의 가능성은 있을 수 있기에 그렇다. 

또 달리 흥미를 끄는 점은, 일차 대수와 그것의 산술을 써서 정리 증명과 귀결 입증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와 귀결의 개념들, 고로, 증명과 입증의 개념들은 현행 문헌들에서 광범위하게 혼동되고 있습니다; 그런 곳들에서 그 단어들은 서로 교체되어 쓰일 수 있습니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곤란 아닌 곤란들을 창조해왔습니다. 일차 대수의 완비성(정리 17)에서 보여질 바로서, 증명되고 있는 것은 그 구별이 적절히 유지되면 현저히 분명해지게 됩니다. (유사한 혼동이, 특히, 상징 논리 문헌에서, 공리와 자명-명제 사이에 보입니다.)

일차 대수의 발달은 수들에 대해 제약된 대수로 (또는 완비된 대수로) 쓰일 수 있는 정도까지 가능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방식들이 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 내가 발견한 가장 편리한 방식은, 산술에서 축약에 제한을 두고 그럼으로써 주어진 공간의 무수한 가로지름들을 대응하는 수 또는 그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Gödel과 Church의 결정 정리들의 적어도 몇몇 증거들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1장에서 다루는 역설 방정식들이 복권(復權)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들 정리들의 의미와 적용은 이제 검토가 필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분명코 이제까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유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텍스트에서 내 목표는, 각 단계에서 창발하는 모든 형식들을 합리적으로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한 발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11장에서는 복소 형식들로까지 확장시켰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해명하는 것으로, 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그 발달를 한정짓고자 했습니다.

그 정리들 대다수는, 적어도 정리들로는, 독창적인 것들이며, 그렇기에 그 증명들도 새로운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익숙한 기초를 깔고 나타나는 대수적 그리고 혼합 정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알려진 것들로 이전에 다른 형식들로 증명되었던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나는 더 분명하게 그리고 더 단순하게 또는 더 직접적으로 보이는 증명들을 찾아낼 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내가 증명한 정리들이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내 정리 16에 가장 근접한 것은 명제 계산에 대한 완전성 증명의 보조 정리로서 분명 Quine이 최초로 증명한 더 약하고 덜 중심적인 정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정리에 대한 몇 년 동안의 숙고 후에서야, 나는 불 대수나 그밖에 대수, 등등 모든 가능한 대수들에서 이것을 참인 것으로 보여줄 아름다운 실마리를 찾아냈습니다.

증명들에 이르를 때마다, 나는 수학과 정신분석 이론의 명백한 제휴로 자주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각 분과에서 숙고하기, 상징으로 재현하기, 신념 공유하기, 그리고 소통하기를 뒤섞어 찾고자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수학에서 우리는 우리가 고대하고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자기-분석의 여타 형식들에서처럼, 물질 세계를 뒤질 필요는 없습니다. 곱하기, 나누기를 할 줄 아는 열 살 남짓 아이라면 누구든, 이를테면, 소수들의 열(列)이 무한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클리드 증명을 보지 않고는 그것을 찾아낼 것 같지도, 죽기 전에 그것을 알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유추가 암시하는 바로, 우리한테는 일종의 원형(原型) 구조로서 수학적 형식을 직접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마지막 장에서 이러한 알아차림의 본성을 묘사하고자 합니다. 어떤 경우든, 순수 개연성 자체에 대한 의문들로 인해 우리가 설정하는 가정은, 일정 정도의 직접적 알아차림이 수학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증명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진술들의 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충분히 큰 유한 표본에서, 유용한 의의를 지닌 참이 아닌 진술들은 참인 진술들을 압도적으로 능가합니다. 따라서 원리적으로, 올바름 또는 적절성에 대한 판단이 타고난 것일 수 없다면, 수학자는 참인 진술들보다는 더 거짓된 진술들을 증명하고자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수학자가 어떤 진술의 진리를 확신하지 못할 때 그 진술을 증명하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가 아직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기에 그의 확신은 증명에서보다는 우선은 여타 고려 사안들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증명 절차, 또는 그밖에 지시 과정에 대한 성문화(成文化)는, 처음에는 유용할지라도, 나중에는 더 나은 진전에 대한 위협으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차 불 방정식들의 해에 대한 증명 구조들의, 대부분 못알아차렸지만 그러나 지금은 성문화된, 추론 부분들의 한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1장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주석에서 보는 것처럼, 고차 방정식의 해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반세기 혹 그 이상 동안 당면 문제에(ad hoc) 입각해서 배전/개폐 공학자들이 떠맡아왔습니다. 그와 같은 방정식들은 지금까지 Whitehead-Russel의 유형이론으로 인해 보통 논리의 주제 사안에서 배제되었던 것들입니다 [2, pp 37 sq, e.g. p77]. 

내가 텍스트에서 보여주는 것은, 해당 함수가 그 깊이에서 홀이든 짝이든 그 자신의 공간으로 재진입하도록 그것의 음함수를 우리가 구성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이들 저자들이 기술한 류(類)의 자기-부정 방정식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와 같은 경우, 그렇게 설정된 방정식의 근들은 상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변수들의 주어진 조성에 대해 두 개의 실근(實根)들로 만족하는 자기-확인 방정식입니다. 

이러한 숙고를 통해, 나는 이제껏 유형이론과 함께 폐기되었던 형식 구조를 복권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구조는 보다 일반적인 방정식 이론과 같은 것으로 취급될 수 있습니다. 그 이론의 배후에는 앞선 수학적 경험들이 쌓여 있습니다. 

더더욱 주목을 받게 될 그와 같은 복권에 대한 기대는, 평면에서 일차 불 방정식은 완벽히 재현될 수 있지만 2차 불 방정식은 그렇게 재현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차수(degree), k의 방정식은 자신의 재현을 위해서는 종수(genus), k-1의 표면이 필요합니다. D J Spencer Brown과 나는 1962-5년에 수행된 미공표된 작업에서 증거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4색 정리와 골드바하 정리 양자 모두 일차 불 방정식에 국한된 증명 구조로는 결정될 수 없지만 고차 방정식들을 우리가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결정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작업을 재촉하는 동기들 가운데 하나는 우주에 대한 우리 지식의 내적 구조에 대한 탐구들은 수리 과학의 표현으로, 그리고 그 지식의 외적 구조에 대한 탐구들은 물리 과학의 표현으로 함께 맞아들어가도록 하는 희망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Einstein, Schrödinger,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의 작업은 물리 지식의 궁극적 경계를,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기 위해 경유하는, 매체들의 형식으로 현실화시키는 데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공통된 지각 경험과 관련된 사실들, 또는 우리가 내부 세계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외부 세계라 부르는 것에 대한 지속적 연구로 밝혀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러한 내부 세계에 대한 한결같이 지속적 연구는 연이어 외부 세계와 최초로 맞닺뜨렸던 사실들을 밝혀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근하고 있는 것은, 바깥 쪽에서든 안 쪽에서든 그 어느 쪽에서든 그것들 사이 공통된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들을 아주 멀리까지 밝혔던 것이나 그밖에, 더 나은 여건을 가진, 이들은 더 멀리까지 밝힐 수 없으리라는 것은 주장할 것이 못됩니다. 나는 그들이 그러기를 바랍니다. 이 에세이를 쓰면서 내가 가한 의도는 지시 계산에 대한 해명이었고, 이 의도가 잘 추진되어 현실로 나타난 이후에야 그 잠재된 가능성이 명백해지자, 나는 그 가능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설명은, 단일체(unity) 이상의 고차 방정식들을 취하는 3차원 재현으로 우리가 진입하면서 물리 세계의 기본 관념들과 연결이 더 견고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중단될 것입니다.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 지점에서 그만둘 생각을 가졌던 것은, 여기서 창발하는 잠재 형식들, 일차 형식에서 나오는 네 번째 출발 형식 (또는 우리가 허(虛)에서부터 생각/계산할 경우, 다섯 번째 출발 형식) 등등은 너무 많고 다양하기에 나는 그것들 모두를, 겉핥기로라도 한권의 책에다는, 제시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Medawar는, 통상 과학적 논문에 요구된 표준적 제시 형식은 탐구자가 실제 하고 있었던 것들을 역으로 재현하는 것임을 관찰했습니다. Medawar가 말하기를, 실재에서, 가설이 처음 설정되고 나면 이어 매체가 되는데, 이 매체를 거쳐 여타 모호한 사실들은 최초로 분명하게 보이며, 그런 다음 수집되어 그 가설을 지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해당 논문의 설명은, 독자들한테, 그와 같은 사실들이 그 가설을 최초로 제안했다는 인상을 주고자 합니다; 그 인상이 정말 그 의도를 달성하든 안하든 개의치 않고 그러합니다. 

수학에서, 우리는 이러한 과정의 역을 보고 있습니다. 수학자는 그한테 일반적으로 허용된 것보다 더 자주 가설들을 고안하고 그것들이 그가 제시한 추리된 그리고 계산된 사실들에 들어맞는지 아닌지를 보고자 그것들을 시험하는 실험을 진행합니다. 그가 들어맞는 하나의 가설을 찾아냈을 때, 그는 그 사실들이 그 가설에서 연역되도록 그 작업을 역순으로 설명한 바를 공표하고자 할 것입니다. 

어느 쪽 영역에서든 달리 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설명에서든, 이야기를 거꾸로 하는 것은 편리하며 시간을 절약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실제 거꾸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종잡기 어렵게, 신비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명백한 역전 현상을 고려하며 Laing이 제안했던 바는 , 경험 과학에서 ‘data’라고 불리고 있는 것은, 앞서 형성된 가설의 준해 선택된, 실재하는 의미에서는, 임의적인 것이기에, 더욱 솔직히 말해 ‘capta’로 불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전된 유추에 따르자면, 최초에는 임의로 선택된 것들로 나타나는 그래서 capta인 수리 과학의 사실들은, 정말이지 전혀 임의적인 것들이 아닌, 우리 존재의 본성과 일관성에 따라 예외없이 결정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조망에서, 우리는 수학의 사실들을 경험 가운데 실재하는 data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분명, 최종 분석에서는 오직 이것들만이 피해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이 닿는 한, 이 텍스트에서 그렇게 피할 수 없는, 그래서, 영원한 것들은 보존하는 쪽으로, 그리고 일시적인 것들은 폐기하는 쪽으로 착수했지만, 어느 쪽이든 전적으로 성공했다는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내 보기에, 그러한 일을 맡아 완벽히 성공할 수는 없다는 것은 구체적 실존 상태가, 그 어떤 형식에서든, 갖고 있는 명백한 결함입니다. (부록 2 참조) 그 어떤 인간 저자의 저작도, 그가 그 자신의 자아란 과거의 방식이나 그의 작업이 영면에 들 미래의 방식에 어울리기보다는 단지 현재 양식에 어울리는 유행복임을 알고 있다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그 저자 특유의 표현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정도로, 양식 또는 유행이 방식 또는 의미를 희생시키는 것은 불가피하며, 또한 지엽적이며 고려해야 할 것을 핵심적이며 신성한 것과 연결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수학 언어의 주요한 측면은 형식성의 정도입니다. 실제 말해진 것들에 대한 속기 제공이, 수학에서, 우리 관심사란 점이 사실이라할지라도, 이는 단지 절반만 이야기한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하려 하는 것은, 경험하는 일상 언어가 활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더 일반적 형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접한 주제에 관심을, 여타 주제들과 공통점으로 확장시키지 않고, 국한시키고 있는 한, 참으로 수학적인 제시 양식은 활용될 수 없습니다.

수학에서, 둘러싸 밀봉하는 일은, 주어진 시야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리고 이제껏 보이지 않던 시야로 초월하는 일입니다. 현존하는 실존이 이치에서 어긋날 때는, 그것의 형식을 재차 현실에 맞게 만들어 변함없이 이치에 들어맞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논리학의 주제 사안은, 상징들을 써서 다룰지라도, 논리학의 기반에 국한되어 있는 한, 수학적 연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것의 기반을 더 일반적 형식의 일부로, 끝이 없는 과정에서, 지각할 수 있을 때에야 수학적 연구가 됩니다. 그것을 수학적으로 다루는 일은, 일상 삶의 경험에 관한 우리 이야기 방식이 담겨진 요람(搖藍)과 같은 형식을 다루는 일입니다. 내가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 논리학의 법칙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러한 형식의 법칙들입니다.

그러한 시도 가운데, 나는 그것들을 전하는 만족스런 방식을 결정하는 것보다는 그 법칙들 자체에 접근할 기회를 얻는 일이 더 쉽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법칙이 보편적일수록, 구체적 양식에서는 더더욱 표현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이 텍스트의 앞쪽 부분들을 읽는 것에서만 아니라, 쓰는 일에서도, 명백한 몇 가지 어려움들은, 5장부터는 분석이 거꾸로 진행되며 언어가 통상 소통 수단으로서 정상적으로 작용하기를 멈추는 단순 상태의 지점를 통과, 넘어서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이러한 정상 용법의 붕괴가 일어나는 지점은, 실상, 대수들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통상 여겨지고 있습니다. 대수들을 이 지점을 너머 거꾸로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현행 기술(記述)에 쓰이는,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실재/현실로 혼동할 수 있는 초구조를 상당한 정도로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어와 그밖에 상징들을 써서 이제까지 모호해졌던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책에서든, 우리가 단어와 그밖에 상징들을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 작가나 독자 모두한테 비범한 기질이 요구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작가로서, 그러한 요구에 응하는 데 불완전했음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 과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개인적 수준에서는 나와, 또는 그밖에 누구와도, 관련이 없는 것임을 (불이 깨달았던 것처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신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기록에 있는 결점들은 그 어떤 것이든, 그렇게 기록되는 것으로 개인적 견해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 오직 내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영예는, 그 기록이 그 잠정적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신이 안배할지라도, 그렇게 맞물려들어가며 일관될 수 있도록 한 도구노동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London, 196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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