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before 2012

20 세기에 대한 경험과 반성(2008) - 미련, 회한이 남았네(2024)

20세기 세상 경험을 정리하며...

“We must become the change we want to see.” - Mahatma Gandhi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어야 한다 - 마하트마 간디,   

 

“Wahrheit ist die Erfindung eines Lügners.” - Heinz von Foerster

          진리란 거짓말장이의 발명품이다. - 폰 푀르스터,   

 

 

 

미네르바 부엉이가 사슬을 끊어낼 때

 

 

 

 

1. '모든 이들의 권력 참여'는 이데올로기다.

 

 

인간 해방의 역사에서, 개체 자각으로서 종교적 해방, 정치적 수준에서 신분 해방, 그리고 삶의 기본 조건으로서 경제적 자유를 쟁취한 이후,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분투 과정에서,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권력에 참여, 관리하는 일은 그 자유들의 유지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일로 여기고 있다. 일견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 중심적 사고는 정당 정치꾼들이 전파시킨, 혁명적 선동 정치의 유물로, 한물간 것이며, 실상, 권력 핵심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의 이해와는 무관하다. 해서, 권력 핵심을 둘러싼 정치적 담화들에 관심 갖기는 각자의 자유들 갖다 바치기의 다른 이름이다: 배제되었음에도 배제되지 않은 것 같은 환상 재생산이다.

 

 

왜냐? 권력이 감당할, 즉 제어 통제할, 가두리의 규모가 커질수록, 적어도 쟁취한 자유들이 유지되는 한, 그 권력 중심의 구성원들의 수는 커진 규모에 비해 적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글로벌 양극화는 이러한 사례의 명백한 증거다. 오늘날, 정치 권력에 참여한다는 것은 분배된 권력만큼 이해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권력 중심적 사고로 쟁취된 자유들은, 배제된, 배제될 대다수한테는, 시간이 흐르면서 규범으로서도 유지되기 힘들어진다. 선택된 소수만이 중심에 진입하고 대다수는 배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로, 권력은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 소수가 많이 먹는 걸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규모를 키우며 소수로 집중하는 것만이 그 유일한 생존 방식이다.

 

 

이러한 권력 중심에 참여 말고, 일반 시민으로 권력에 대한 적극적 또는 소극적 감시, 견제로서 참여를 조장하는 것은, 소도시 국가가 아닌 한, 권력 중심에 진입하려는 자들이 구걸하는 지지, 댓가 없는 봉사, 기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것은 실제 현실에서 흔하게 보는 바며, 이와 대비되는 역사적 대안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은 것으로, 노동조합의 정치 참여와 협동조합으로서 사회 참여가 있다. 생존을 위해, 자유를 위해, 인간 삶의 가치 지향을 위해, 자발적으로 사회적 재생산의 일부에 참여, 자기 소속 집단의 보존과 이익을 위해, 그 집단의 사회적 역할과 지향을 위해, 합의된 정치적 판단을 갖고 행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없는, 자기 가진 힘만큼의 정당한 권리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고삐 대신 말꼬리 잡고 앞으로 가자는 소리만 들리는 세상은 분명 앨리스의 이상한 세상이 분명하다. 

 

 

 

2. 경쟁, 권력보다 근원적인 협력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각각의 해방의 단계마다 피흘려 쟁취했던 것들이 쟁취된 이후 그냥 그대로 유지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 역사의 계통 발생적 진화, 진보는 환상이다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한 구성론의 관점을 참조하라). 역사의 각 단계마다 성취한 각성, 즉 자유의 상태를 개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그리고 서로 협력과 협동이라는 상호작용 가운데 깊숙이 문화로서 체현, 체득한 경우에만 그 자유들은 향유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개개인들의 관점에서, 역사는 순환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사회의 구성 주체들은 각기 자기 몫의 자유들을 쟁취, 유지를 위해, 항상, 해야만 할 일들은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관찰자가 보기에, 많은 자유들이 거대해진 권력이 배양한 더 큰 가두리에서 상실되었고,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실재론은, 인지 주체가 자신의 경험 너머 자신과 독립된, 객관적인, 실재하는 세계 또는 실재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접근할 수 있다는, 그래서 그 세계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해서, 그 진리는 누구나 인정해야 하는 복종해야 하는 보편타당한 절대적 권위를 획득한다. 다른 한편, 권력은 고래부터 신, 하늘, 진리의 위임을 받은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했으나, 오늘날 권력은 <대의제와 자본 축적의 자유> 형식에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하늘같은 국민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부의 축척의 자유가 신, 하늘, 그리고 진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간접적일 뿐> 같은 형식임은 분명하다: 물리적, 형상적 도구든, 개념적 도구든 그 도구의 소지자가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정말 취약한 바를 근거로 삼아 그 사용을 자신의 행위 구역 너머까지 사용함으로써 타인들의 노동과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같은 형식이다.

 

 

이와 같이 모든 권력의 정당화에 기여하는 실재론을 근저에서부터 붕괴시키고 있는 사조로서, 개체로서 각성을 핵심으로 제시하는 구성론 또는 사이버네틱스가 있다. 사이버네틱스에서, 유기체는 관찰자가 보는 그 유기체의 외적 환경에 여하한 방식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닫힌 시스템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관찰자 또한 자신의 경험 너머 외적 환경이라는, [대]자연에 여하한 방식으로도 접근 불가능한 닫힌 자기-준거적, 자율적 시스템이다 (이 말은, 우리가 '우리 현실'이라고 부르는 '경험적 실재'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접근 불가한, 우리가 '저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하는 '객관적(또는 존재론적)  실재' 속한 무엇과는, 비교할 수도, 그 연결 고리를 찾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마주하는 세상, 특히 타자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신비롭게 여기며, 우리 현실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알아보고, 해석, 숙고하며, 그걸 다루기 위한 우리가 가진 도구들로 제어, 통제해낸다. 모두가 다 하는 일이지만, 신비롭게 여기는가 여부와 그 귀결로서 자신들의 도구 사용의 제약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는가 여부는 다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 개체로서 인지 주체는 타자들을 구성하고 그들을 자신의 일부로서 관리하지만, 동시에 그 타자들과 협력이 개체로서 자신을 유지하는 방식임을 자신의 개체 발생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자타일여가 자연스레 발현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개체로서 인간이 지닌 전체성을 근거로하는 공감 능력이라는 인간의 기본 깜냥의 발현이다). 이로써, 자신의 몸적 형식을 자기 자신의 전부로 여기는 다른 유기체, 특히 원숭이들이 ‘출발부터’ 협력보다 이기적 경쟁을 우선시하는 것과 비교해서, 그 반대로, 출발부터 인간 아기는 경쟁보다 협력을 우선시하는 심적 기초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토마젤로의 "인간은 왜 협력하는가" 참조).

 

 

 

3. 사회적 환경, 문화는 개체들로서 우리가 배양하는 것이다.

 

 

시작에서 말한 것처럼, 종교, 정치, 경제적 자유들은 오늘날 하나의 보편적 규범 혹은 기준으로 세계인들 마음에 자리 잡혀 있다.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해방의 수준과 유지 수준은 각기 다르다할지라도 기준으로서는 그렇다. 그렇지만, 앞서 쟁취된 것들 말고는 더 이상 쟁취할 새로운 자유의 형식은 없는가? 이미 확립되었다 보는 것들을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확대하면 그 뿐인가? 상식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 삶은 여전히 세 영역에서 자유롭다고 하기에는 턱도 없다. 특히나, 현실에서 이미 쟁취된 것들마저 이 세 영역 모두에서 퇴행적 과정을 보이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그리 생각한다.

 

 

왜인가? 이상에서 말한 쟁취한 모든 자유가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우리 환경에서, 신생 개체들의 이들 자유에 대한 자연스런 획득, 체득 기회를 부여할 문화는 누가 배양하고 있는가? 그 환경의 핵심 조성 주체는 거대 독점들과 그 독점들을 떠받치는 집중화된 권력 기구로서 국가다: 이미 모든 국가들에서 주류 문화는 국가에 예속된, 국가가 부양하는 국가 기구의 일부다. 그러나 그 환경을 지속적으로 배양하고 있는 건, 한편으로는, 세 영역 모두에서 아직 자각이 부족한 채, 태어나자마자 가혹한 경쟁에 내던져져 협력은 결정적 배신을 위한 바닥깔기라는 처세 최고 전략을 숙달할 때까지 경쟁 문화에 이바지하는 하나하나 우리들이요, 은퇴하고서 경쟁에서 한발 벗어나서는, 황폐해진 영혼을 붙잡고 연명하며, ‘세상은 그런 거야’로 경쟁 반대편 허무 문화 재생산에 알게 모르게 동참한 한명 한명으로서 우리들이다.

 

 

우리 환경, 문화의 설계자로, 자본, 권력을 언급할 때, 그들이 의도적, 적극적으로 환경, 문화의 구조를 설계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본성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들이 가진 삶의 무늬가 우리 세상의 디자인이 된 것이다: 자족을 모르고 타자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좋은 걸 탐내고 그래서 빼앗으려, 힘을 보이거나 성내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의 껍데기를 쓰고 사기를 치며, 이게 광대의 익살도 없는 수치라는 걸 모르는 두꺼운 얼굴, 이것이 그들의 본성이다. 이러한 밑그림으로 그려진 환경, 문화를 계속해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자본, 권력의 역할이지만, 이를 배양 유지하고 있는 건 바로 우리 하나하나라는 것... 누가 더 책임이 클까? 오늘도 우리는 생존을 위해 우리가 배양하고 있는 이 세상의 경쟁터로 굳센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선다. 별 수 없지 않냐고? 뭘 어떡 하라고? 당장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맞다. 살아남는 것이 생명체의 최우선 과제다.

 

 

 

4. 협력 문화 창발 조건: 각성

 

 

한편, 이러한 경쟁터에 발을 디딘 우리 대다수는 가망 없는 목표 추구들에 따른 반복적 실패로 심각한 상처를 입는다. 나름 성공한 이들한테도, 각기 전투 과정에서 너덜너덜해진 자존을 그에 대한 여하한 보상으로도 평형을 유지할 수 없다는 자각은 피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 대다수는, 핏빛 경쟁터에 대한 피안으로서 허무주의를 자연스런 귀결로 받아들여 양산, 육성하게 된다. 생각하고 협력할 수 있는 위대한 원숭이들 가운데 최고의 지능을 가진 존재가 선택한 최악의 삶의 형식이다. 허무는 경험에서 얻은 반성을 새로운 구성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반성 모두를, 잊고 싶은 것, 지우고 싶은 것, 말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처리함으로써, 이 세상 대부분을, 제거될 수 없지만, 제거함으로써 세상을 쪼그라들게 한다. 허무로 쪼그라든 세상이 자라는 우주한테 배려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은 거의 없다.

 

 

 

이렇게, 협력보다는 경쟁, 현실 적응이라는 '자족'보다는 환상을 쫓는 꿈을 북돋는 문화가 바로 쟁취한 자유들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기저를 이룬다 (전자는 생명체의 생존 방식인 네거티브 피드백이지만, 후자는 생명체의 자멸 방식인 포지티브 피드백이다).. 또 다른 한편, 더 이상 자발적, 자생적 협력에 기초한 상호부조, 상호협력의 문화를 인간 사고의 기저에서부터 북돋는 경향은 기껏해야 인간 이기심을 기초로 하는 협력 방식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기초한 협력 진화의 최고 형식은 기껏해야 글로벌 사회에서 특정 집단이 공동체 나머지에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가라는 범위를 넘어 설 수는 없다. (팃포탯 최고 전략의 핵심은 누구와든 항상 협력하되 상대가 배신 즉시 즉각, 딱 그만큼, 다시는 배신하지 못하도록, 응징하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게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만이 사용 가능한, 역사 이래 줄곧 사용되고 있는, 권력 집단의 자기 유지의 전형적 수법이다 - 이는 권력 추구형 인간들이 항상 읽어온 마키아벨리 '군주론'이나 삼국지의 권력 쟁투에 대한 권력형 인간들의 경험을 일반화한 이론일 뿐이다.) 

 

 

 

 

동시에, 더 나아가, 자본, 특히, 거대 자본은 이러한 경쟁과 허무주의가 제공하는 광대한 소비, 안식의 필요를 자기 팽창의 원료와 에너지로 삼고 있다. 원자화된, 개별화된 우리한테, 어떤 사회 구조,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와 관련해 분명 자유가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선택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 자유가 기초 없는 공허한 것임을, 우리 자유를 테두리 지우고 있는 그 틀을 깨닫는다: 

 

 

우리는, 자본, 거대 자본들이 마련한 스트레스 만빵인 밀집된 주거지에서 개별적 안전을 확보하고; 그들이 마련해준 보험, 연금, 봉사와 기부 같은 기만적 부조 방식으로 사회적 안전을 유지하며; 그들이 제공하는 건강 기준치 이하의 농약, 항생제, 방부제, 기타 화학물질로 범벅된 음식을 먹고; 그들이 마련한 99% 낙오자 양산을 목표로 한 교육 시스템에 아이들을 가련한 마음으로 던져 넣고; 그들이 권력, 자본 집중의 기반으로 만든 항로와 도로, 놀이터를 자동차로 매연을 마시면서 전전하며; 대형 미디어를 통해 제공되는 영화, 쇼 프로, 드라마, 등등과, 이에 신속한 접근을 가능케 하는 신기술 도구들로 그 광대들에 시선을 집중하거나, 이 모든 것들을 한탄, 저주하거나 그 향유의 격차를 비판하면서; 니코틴, 알콜, 카페인, 등 온갖 약물들로 지친 몸과 쫓기는 마음을 달래다; 이내, 병든 몸뚱이와 추스릴 수 없는 마음을 그들이 제공한 인생 최후의 블랙홀, 거대 병원, 요양원, 약물 혹은 정신분석(분석된 자는 분석자의 틀에 갇힌 강시가 된다)에 의탁함으로써 흔적 없이 사라져 간다. 이리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 때는 사람들이 이리 시간을 보내게끔 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고 즐겁지 않은 일들을 하며 삶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 현실은, 우리가, 권력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이들처럼, 그들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멀리 여행, 이사, 이동하는 것처럼, 수많은 이들을 만나는 것처럼, 글로벌하게 생산된 먹거리, 공산품, 문화 상품들을 소비하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며, 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맞이한 우리 행위의 결과다.  

 

 

5. 협력 문화 창발 조건: 지금 여기 있는 것들로!

 

 

대안을 찾는 해방된 개인들 가운데 이 거대한 가두리 안에서 배양되기를 거부하고 성공한 이들과 사례들은 거의 없다. 대안 없는 거부 또는 거부를 위한 협력은 곧 죽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 일탈은 우주 미아가 될 뿐이다. 여기서 대안이란 그 거대한 가두리를 알아차리고 그에서 벗어나는 개체로서 각성과 그에 이은 자기 변화를 말하는 것이지, 현존하는 사회 구조를 대신해 우리가 구성한 것으로 대체할 그 어떤 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획기적인 정치 실험일지라도, 그 공동체 구성원 다수의 일상 삶의 양식의 변화를 통해 기도되는 규범, 제도로서 확립되는 정도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그걸 넘어서려는 순간, 그러한 기획은 음모, 압력, 유인, 선동, 동원이라는 정치 수단들이 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각성한 자들의 방법이 아니다. 각성한 자의 대안의 시작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자기 행위 구역 내에서, 불가피하지 않는 한, 자기 의지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상 언급한 현실을 유지하는 생각하기와 행하기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 깜냥에 맞게 자기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협력은 다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당신을 협력 대상으로 알아볼 수 있겠는가?

 

 

인간 협력이란 인간의 심적 기저에 이미 자리 잡고 있음을 보건데, 이를 각성한 자들 사이 협력하는 가운데 창발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유지 키워갈 가능성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최고의 협력이 창발되기 전 우리의 모든 협력은 거대 권력의 가두리 안에서 동화, 무효화되기를 반복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관찰하고 있는 한에서는 그렇다. 그렇다고 최고 협력 이전의 협력들이 무의미하다거나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협력의 시작, 조건과 끝, 목적을 주어진 현실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다. 그것만이 우리 협력의 성과를 유지시키며, 가두리에서 동화 무효화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이다. 즉, 주어진 조건에서 우리 자유들을 후퇴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최대 행복을 구하는 일이다.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살든 주어진 것들과 사람들과 그렇게 성공적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일터이니....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최고의 협력을 경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경험에서 최고를 각자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대안 실행자로든 관찰자로든, 우리 모두는 이내 새로운 구조, 그것이 전 사회적인 것이든 조그만 공동체 운영 구조든, 지향성이 자발적 협력으로부터 창발되지 않는 한, 허무가 재차 밀려오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왜냐? 그 가설적 구조를 전적으로 합의에 의한, 언제든 수정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털끝만큼이라도 반드시 필히 고집해야만 하는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이내 거짓 생기로 활기를 띠다 이내 온 몸이 썩기도 전에 마음들은 점차 지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자유의 영역과 그 정도에서 퇴행을 거듭하는 현실도 부족해서, 추가적으로 자유를 자발적으로 축소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각성이, 신비적 지혜와 합리적 지식, 양자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못한 결과, 자초한 것은, 대체로,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상황을 자초했다. 각성된 자들은 반성적 자아에서 사회적 자아로 모드가 변하는 경우 예외없이 불경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시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통약 불가능성 참조). 진정한 소통이란, 이해하기의 이해하기라는 점을 알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일들이 전사회적으로, 그리고 작거나 큰 규모의 공동체들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반복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성공한 것들이 갖는 특징 또한 분명하다. 현실적 필요로, 있는 것들, 가진 것들로 출발할 것, 이데올로기, 즉, 권력과 권위에 입각한 견해, 의견의 강제가 아닌 지속적인 상호이해에 입각한 상호부조와 상호협력을 통해 공동 목표를 조정할 것...등등이다. 이러한 태도는 각성한 자든, 아니면, 삶의 생존 그 자체에 입각해 있는 자든, 두 경우한테서만 볼 수 있는 태도다. 해서, 반성할 기회와 시간, 여유를 갖지 못한 자에게 각성이란 있을 수 없듯이, 불가피성, 절박함 이전에,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를 일도 없는 것이다.

 

 

 

6. 협력 문화 창발 실패: 이데올로기로서 실재론

 

 

한편, 공허한 실재론의 역사(Radical Constructivism, 2장 참조) 가운데, 실재론의 가면을 찢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를 기회가 한번 있었다. 그것은 19, 20세기 전환기 러시아에서 였다. 이와 관련해, 70년대 전후,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침서였던 소비에트 철학 교과서가 채택한 입장이 다름 아닌 ‘진화론적 인식론’의*** 판박이였음을 상기할 수 있는 이라면, 그 전환기, 러시아에서, 권력에서 소외받은 아웃사이더들의 글로벌 권력재편 과정에서, 권력=진리 자체의 정당화를 위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소박 실재론, 타락한 유물론으로 전락시킨 것은 바로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 책은 반복되는 저급한 논리들과 인신공격들로 가득 차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 없지만, 당시 이것의 역할은 권력의 중심과 주변부를 가르는 정치 조직화의 도구로 기능했고, 이후, 세계 사회주의 종파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는 건 이제 상식으로 자리 잡힌 것 같다. 

 

 

***이들 변이들이 몸의 형식 혹은 시지각물 혹은 과학적 이론까지 통제하고 있다 해도, Ding an sich(물-그-자체)는 항상 간접적으로만, 언제나 알기 주체의 설정(가정) 언어로만 알려진다. 이러한 의미로,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반성(反映),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가정들에서 선택되어진 것>에는, 간접적이나마 일종의 객관성이 있다. (Campbell,1974, p.447) 

 

 

사회주의 전통을 자처했던 이 종파의 출발은, 인민들의 개체로서 해방 철학으로 확립될 수 있었던 보그다노프와 같은, 사이버네틱한, 구성론적 경향성을 그러한 타락한 유물론적 공격과 선동으로 잠재우는 것이었다. 인민들의 사고를, 반성 없이, 반영 또는 반사만 작동하는 소박 실재론에 정체시켜, '개체로서 나' 없는 우리라는 순박한 공동체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이를 통해 권력 집중에 인민을 동원, 정당화시키는 수법이었다. 반면, 반성은 인간이 자신을 해방된 개체로서 자각하는 도구이자, 이해하기=발명하기의 원천으로, 해방된 개체로서 자신을 유지시키는 핵심 도구다. 해서, 각성한 노동자라면, 이러한 반성의 결과물을 들고 통상 객관적 세계와 연관시키는 진리 놀음에 끼어들기보다는 그 도구들로 최고의 협력 문화 창발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 현실은 글로벌하게 커진 놀음판의 판돈 다툼에 대한 기여였다. 

 

 

 

 

7. 좀비 문화의 창발 도구로서 실재론: 될 때까지!

 

 

오늘날에까지 이러한 한물간 수법이, 오롯이, 특정 정파나 종파들의 재생산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정파나 종파들 너머 자본이 통제하는, 이상에서 묘사한 우리 삶 자체인,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는, 보다 진화된 실재론이 인민들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명백히 불가능한 것들을 노력하면 언젠가는 다다를 것이라는 가망 없는 사고와 행위들을 반복하게 하는, '될 때 까지' 또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와 같은 구호로 표현되는, 작동하지 않는, 유효하지 않는 사고나 도구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게 하는 것은, 자체로, 명백히, 자유의 퇴행을 강제하는 걸 의미한다. 자유란, 무엇에 대한 각성, 그 어떤 속박으로부터 해방, 그리고 해방 이후 이전과는 다른 '실제' 작동하는 새로운 관행, 문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無賓主話로 상호존중, 시천주, 隨處作主로 자율북돋기, 조화정); 탈주, 일탈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죄수나 반항아, 이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리를 나의 빛으로' 삼아 허망하게 가망 없는 시간과 공간들을 진탕 소모한 이후, 소비, 조명(시선) 문화에서만 자존을 구하는 삶의 지향들이 대세로 굳어지는 바에 저항하여, 현실 조건과 제약들을 온 몸으로 겪어 알아차리는 가운데 개체들의 활기찬 적극적 창조적 적응을 도와야 하는 사고 방식, 말인즉, 실재론의 반대편에 있어야 할 사조들은 현실=실재의 마법에 걸려 길을 잃었다. 진리=권력이 기반한 경험 너머 '실재'를 비판하는 것이 우리의 물적 현실 비판과 동등할 수는 없다. 전자는 절연할 대상이지만, 후자는 우리가 적응해야 할, 혹은, 어쩌면 우리의 적응 방식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우리가 만들어오고, 만들고 있고, 만들어갈, 우리 자신들의 총체이기에 그것과 연은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개개인이 관점을 바꿀 수는 있지만, 우리 사이 물화된, 작동 시스템은 우리가 함께 바꾸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여기가 유물론의 출발점이다. 

 

 

이를테면, 노동력 판매로만 생존해야 하는 자한테, 현실의 물적 조건에 적응한다는 것은, 위계화된 노동 시장에서 일단 적합한 노동의 질을 갖추는 것이다. 현실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적 구조물로 지칭하고 그 구조물을 우리와 독립된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것은 우리 경험 너머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내 서로 얽혀 살며 사용하는 도구임에도 그리 여긴다. 독립된 실재라고 여긴 것이 인간 진리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으면 깨버리거나 버릴 수 있다. 그렇지만, 사용하는 도구가 미덥지 않다고 버리는, 즉, 더 나은 것이 눈 앞에 짠하고 나타나 유효성이 확인되기 전까지 내쳐지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자본'은 우리의 생존 도구로서 메커니즘이자 우리가 함께 쓰기에 우리를 제약하는 물적 조건이다. 이것 알아차리기, 이해하기는 새로운 삶 창조하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각성한 노동자여야 한다.) 

 

요컨데, 현실을 제약과 도구들로 조성된 것으로 보는 실용주의, 도구주의 또는 유물론 관점에서라면, 우리의 지속적 협력으로 제약들을 적게 약하게 만들고, 도구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가는 지향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는, 통제 측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많은 고달픈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반면, 경험 너머 다다를 수 없는 객관적 실재의 진리를 쫓도록, 혹은 그와 유사한 방식에 입각해 목표들을 설정하도록 유도된 관점을 갖고 실패를 반복하며 가망 없는 노고들을 쏟는 경향이 대세, 주류를 유지토록 하는 것은, 누가 보기에, 너무 많은, 자신들과 비슷한 자유를 확보하고 그들만이 향유하는 공동체 제어 권리로서 마지막 자유까지 넘보려는 자들을 미궁 속에 몰아넣어 다람쥐 쳇바퀴 돌도록 하는 정말 싸게 먹히는 방식이다; 인류 공동체 구성원들 다수가 마지막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말인즉, 인간 해방의 마지막 단계는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커진 국가 권력의 해체다. 다시 말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삶의 모든 양식들을 유지시키는 크기다. 감당할 수 있는 크기, 이것은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한, 적응을 위한, 작동 가능한 대안 창조를 위한 시작점이다. 

 

 

 

8. 진리=권력 방어의 수법

 

실재론 변신의 역사에서, 현대 버전인 비판적 실재론을 보고 있노라면, 오늘날 자본, 특히 금융 자본의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금융 상품 설계들, 그리고 이와 똑같은, 하지만 엄청 후진, 방식으로 제시되는 국가 관료들의 정책들이 함께 떠오른다. 조삼모사 원리를 기본으로 끊임없이 호구들을 불러 모으는 보험, 투자, 상품들,.... 재정 붕괴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입, 세출의 지속적 확대와 확장을 전제로, 효율과 효과란 오직 표심으로만 측정되는 가운데, 정부, 자치체들의 마구잡이 비생산적, 특혜적 간접분배 방식으로서 소모적 사업들이 그것들이다; 오늘날, 권력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획득되는 이득 분배에 참여하는 것이다.

 

 

가망 없는 경험 너머 저 세상에 대한 진리 추구가 이내 불가능하다는 것이 더없이 분명해진 마당에,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진리를 소지하고 혹은 그에 다가갈 수단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주어진 혹은 행사되는 권력과 권위를 내려놓을 수 없는, 놓고 싶지 않은 자들이나 집단들한테, 합리성 혹은 그러한 선택을 기대하는 것은 정말 가망 없는 짓이다. 그들의 객관성 주장하기는, 그들 하는 일에 대한 책임성 회피하기이며, 이는 신앙인들이 인간사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악습이다. 합리성을 가장한 객관성의 실제 모습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느끼고, 관찰하며, 말하는 자신은 없고 그저 권력이 가공한 원하는 사실만을 전하는 앵무새들만 있을 뿐이다.

 

 

원하는 것들만을 사실로 만드는 권력자들한테 합리성이란, 항상,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부분으로서 측면만을 강조한, 문제 전체를 감싸는 외피로서 합리성일 뿐이다. 그들 이득 취득 메커니즘이 곧 사회 전체의 메커니즘을 대표하는 한, 다른 대안 메커니즘들이 주도권에 제동을 걸지 않는 한, 역사에 보듯, 전체 사회의 관리와 통제는 위기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요컨데, 그들한테, 살 길이란, 이렇게, 합리적이게끔 보이게 더 크게 더 복잡하게 만들어 문제들을 해결 난망하게 만드는 길이 그들의 권력, 권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 방법을 사용해왔다(이것은 정말 중요하다. 사람들은 왜 슈마허는 알지만 코르는 모르는가?).

 

 

 

9.진리=권력 포기의 공포

 

 

또한, 어떠한 타자에 대해서도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부칠, 원래부터 마땅한 권리는 그 누구한테도 주어진 적이 없다는 구성론적 귀결이 확인되면, 실재론과 절연한 자의 행위 양식은, 이전 확립된 여하한 것에 기대서도 상대를 압박하지 않는, 그리고 자연스런 상호부조의 정신을 깔고 상호이해에 거치는 협력을 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 양식은 자신이 가진 기존의 대부분의 것들, 특히 윌리엄 제임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물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포기, 갱신 과정은 물론 정신적(영적) 자아의 고양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권력, 권위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자들의 선택은 두 가지 방식으로 현상 유지를 정당화시킨다. 한편으로는, 비판적 실재론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된 합리적 구성물들을 과거 현자들의 사고로 격상, 혹은 격하시켜 일반 사람들이 접근 불가능한, 실천 불가능한 이상적 관점으로 매도하거나, 또는 그 대안들이 갖고 있는 순환성 구조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거론하며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여하한 실재도 그 어떤 이의 구성물일 뿐이며, 여하한 객관적 실재도 특정 집단의 상호주관적 경험, 또는 합의의 결과일 뿐이라는 점을 승인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력 행사의 합리적 정당성의 근거를 뿌리 채 제거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구성물인 실재의 객관성 확보를 위한, 경험 너머 실재와 연결 끈을 하나 만들었다. 그 끈이란, 과거, <감관 데이터가 저 세계 정보를 나른다>는 주장에서, 감관 데이터의 새로운 버전으로, 오늘날에는 크왈리아(감각질)로 이름만 바꾸었다: 이것은 그저 인지 주체의 또 하나의 구성물일 뿐이다. 여하튼, 있을 수 없는 객관성 근거를 갖다 붙이는 것이다: 여하튼, 도망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객관성 주장하기는 책임 회피하기다). 그들 정당화 방식의 모호성은 과학, 심리 철학에 깃든 형이상학에서 두드러진다. 이러한 쓸모 없는 허구와 혼동들을 동원해 일반인들을 도구적으로, 유물론적으로만 사고하는 몽매한 인간들로 내리까는 것이다. 그들한테, 사람들의 각자 경험 세계 관리자로서 지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의 심리 상태가 이미 파탄 지경에 이르고 있는 마당에, 그들 인식론의 사회적 표현형인, 권력의 사용 방식 또한 합리성의 한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들과 온갖 종파들은 협력 관계에 놓이는데, 그것은 앞서 언급한 신비와 합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대한 방조 협약으로서, 한편에서는, 근대 과학의 유용성과 전사회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불합리의 신비화로 신비 아닌 신비의 확장이 광범위하게 조장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체 적응 수단으로서 합리적 지식은 진리로서 자격이 부여됨으로써 권력 정당화의 수단이 되고, 그로써, 정말 진정한 신비, 타자를 침해하는 도구가 되어, 우리 일상에서, 상호 폭력의 문화의 근저로 유지된다. 비판적 실재론이 정파들과 종파들의 공통 분모가 되는 지점이다. 권력 비판 문화가 이전보다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지만, 그 문화가 사용하는 도구가 겨누는 지점은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기에, 각성했다 하는 자들의 이에 대한 자각은 일천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사회에서, 저녘이면 동네마다 번쩍이는 십자성과 골짜기마다 파헤쳐져 세워진 구조물들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지는 않을 것이며, 정파들이 권력을 주고받으면서 '구성주의'라는 슬로건을 걸고 행한 교육 정책으로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거리에서 약자를 찾아 폭력을 행사하며 패거리의 소속감 강화로 자신들을 안전 보장에 인생을 낭비하는 것에 일말의 효과라도 보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말했듯이, 현실은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다.

 

 

10. 독점 자본=국가와 실재론의 밀월

 

 

요컨데, 이런 견해에서, 우리시대 글로벌 가두리를 지탱하는 기초, 한편에는, 개인 해방과 민주주의는 쟁취,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배양, 유지, 확립시키는 것임을 망각한 인민들을 부채와 소비에 중독시켜 좀비 문화를 배양하는 가운데, ‘집중과 확대만이 살길이다’라는 자신의 생존 방식을 유지하는 <거대 자본들과 그들의 국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들 목표와 행태들을 정당화하며, 가망, 효과 없는 사고와 행위들의 반복으로 특징 지워지는 좀비들의 특정 방향 시선 고정이라는 속박 재생산에 기여하는, <비판적 실재론을 최신 버전으로 갱신한, 진리=권력의 수호자로서, 실재론>이 있다. 

 

 

이 둘이,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오랜 기간, 노골적으로, 하지만 오늘날에는 은밀하게, 역사적 내연의 관계에 있음은, 볼려고만 한다면, 명확히 보이는 것이다. 당신이 개체로서 해방된 자라면, 개체로서 타자에 대한 해방에 기여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타자들에 가해지는 여하한 속박 유지 장치에도 기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속박의 기원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11. 과학과 종교 전쟁의 실상은 권력 다툼이다.

 

 

덧붙여, 실재론을 체제 종교의 수호자로서 강조점을 두는 것은, 대체로 의심할 바 없는 타당성을 갖지만, 그렇다고 체제로서 종교에 초점을 둔 비판, 공격들은 죽은 말에 채찍질하기요, 쓰러지는 남의 집 기둥 붙들고 버텨주기와 같은 것이다. 우리 시대를 지탱하는 합리성이라는 기반에서 보자면, 모든 종교는 우리 세상에서 실제 발 딛고 서 있을 자기 영역을 이미 상실한 상태다. 종교가 확립된 체제로서 명맥 유지는, 오늘날 거대 자본과 집중화된 국가 권력이 합리성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무자비한 폭력성을 드러낼 때 그 희생자에 대한 수호자로 자처, 행동하는 가운데서 가능할 뿐이다. 이럴 때를 제외하면, 모든 종교, 종파는 자체로 자본과 국가에 기생하는 다단계 사기 조직임을 일상에서 끊임없이 확증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것이다. 

 

 

냅둬라! 잔가지들이 다 타고 나면 조용히 스러지게... 나름 삶의 신비를 겪고 그것이 진짜 신비라 믿고 나름 최고의 자존을 건 자한테 칼을 대 깊숙이 그것을 찌르는 것은 모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새로운 사고 경향, 그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협력의 창발을 주요한 지향으로 삼아 거대 독점 자본과 국가 그 자체를 해체해야 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면, 방랑하는 개개인들을 공격하는 것은 사그러지는 불을 타오르게 하는 거고, 그것은 또 다른 함정에 빠져들게 한다; 모든 방랑자들이, 어디서 헤메고 있든, 거하고 싶은 천국은 상호부조와 상호이해가 넘치는 건강한 생산적 노동 공동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래 들어, 종교를 중심에 두고, 실재론을 종교와 결부시킨 비판이 전면에 등장하는 대신(물론, 카톨릭의 경우 여전히 강고한 연결을 갖고 있지만, 여타 종교들은 신, 혹은 절대자와 관계를 신비적, 개인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실재론적 과학과 실재론적 종교가 사람들 전면에 나서 권력을 다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상의 실재론의 변신과 실재론의 핵심 기능을 가리우는 우리 시대 글로벌 가두리 관리자들한테 고용된 광대들이 벌이는 미네르바들의 날개 짓을 잠재우고 경멸하고자 좀비들을 불러모으는 쇼에 불과하다. 때가 되면, 그 날개 짓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겠지만, ...

 

 

 

 

Whenever Being vis a vis a world with the help of a reality or assumptions, we are not to grip a sound of truth as a power in compensation for throwing them away beyond the world, but to feel an enchantment of lives sprouting up together after plowing them up. This is the purpose of us.

 

우리가 진짜(實在)라, 그러리라 여긴 것들에 기대거나 그것들을 짊어지고 매 순간 세상을 마주하는 것(以心傳心)은, 그 마주한 세상 너머로 그것들을 내팽개쳐 진리라는 권력의 나팔 소리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不立文字), 그것들을 거기다 갈아엎어(直指人心) 함께 움트는 생명의 환희를 맛보고자 하는 것(見性成佛)이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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