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before 2012

공감 과잉, 내 사람?(2012) - 빤야 듣기, 이해하기, 직접얻기의 필요(2024)

지난 금욜날 저녘 MBC  다큐 아마존의 눈물 첫머리에
아주 인상적으로 살고 있는 원시부족 조에족 이야기가 나온다.

20-30인 정도 부족이 주변에서 얻은 것들로 완벽한 자급자족을 이루고 살고 있다.
결혼은 폴리가미 형식으로 1처2부, 1부3처, 결혼 지속기간도 자유 의사에 따른다.
나누어먹는 것이 능력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두어지나,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전체와 관련된 불만은 전체의 관심(간지름태우기)으로 해결한다.
오늘 사냥이 별거 없어도 내일 먹을 것을 걱정을 하지 않는다. 없으면 없는대로...

그들은 완벽하게 무지하게 보인다.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 이외에 것에 대한 무지...
에덴의 무지요, 붓다가 말하는 아이의 무지다.

이 무지에 대한 부러움이 유토피아 관념을 만들어냈고,
모든 종교의 이데아, 모든 혁명의 최종목적에 원형을 제공한다.

인구증가, 경쟁, 다툼의 증가 가운데  나이스한 협력자들보다는
쉬이 얻기를 즐기는 배신의 유전자가 강한 자들의 우위로
약탈과 착취, 전쟁, 권력 추구가 일상을 점하는 세계가 우리 현실이다. 

문제 해결의 단초로 소유관계의 변혁을 외쳤왔던 것이 지난 근대 이후의 일반적 경향이나,
문명 출현이후 각성자들은 보다 근원적 문제, 개인들의 무지로의 회복에 관심을 보여왔다.

무지를 파괴하고 소유욕을 창조하는 과정, 특히 사람에 대한 집착, 소유욕은
공감(empathy), 말인즉 감정이입의 지나침에 있다.

공감은 인간 상호관계에서 필수적 요소다.
한 개인이 타자를 구성한다는 것은,
먼저 허구로서 그 타자를 자기 경험요소들의 집합체로 구성하며,
그 타자와 상호작용을 거쳐 그 허구를 진짜(real)로, 실제(actual)로 확보한다.
그 허구는 지속적으로 수정되기도 하지만, 그 허구의 변화는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향을 띤다.
공감은 그 허구 구성자가 그 허구, 즉 타자에 자신의 감정을 투입하는 일이다.
자기가 겪지 않은 타자의 경험에 기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슬퍼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타자들의 경험을 보고들으며, 심지어 영화와 소설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 모든 감정적 공명(共鳴)들을 이행한다.
공감은 타자의 자기화,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불가결한 생명체의 기능으로 인류의 가장 강한 힘이다. 

이 공감의 에너지를 누가 어떤 매체를 이용해서 어떤 일에 어떻게 사용하느냐? 무슨 목적으로?라는 질문보다는 
'그러려니' 자신의 공감에너지를 쏟아내면서 '그러려니' 이것이 우리들 대다수의 현실이다. 
매체들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 상호관계들이 해당된다.

해서, 해당 조건, 상황에서 그 과정, 대상이 필요해서 기능했던 자기화의 확장, 외삽은,
그 적절성 여부를 반드시 확신해야 한다.  
반성을 통해 공감의 절제, 공감 필요의 적확성, 이를 위한 훈련, 그리고 상호제어까지... 
이 반성의 자리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리며, 제로-준거하기의 자리다.
외롭지 않은 혼자만의 자리다. 외로움을 느낀다면 그 자리는 그 자리가 아니다.

타자의 자기화 과정, 공감의 지나친 반복은 타자, 즉 허구의 수정 가능성의 봉쇄를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의 대상화, 고정화, 즉 물화를 의미하며, 타자에 대한 소유욕의 출발을 형성한다.
지옥의 문이며, 벗어나기 힘든 벌어진 업들이 풀리기까지... 하나 고행도 경험이니...

타자를 언제나 구성에 있어 열려 있는 존재로 여기며, 공감의 필요를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수행자들의 오랜 전통에서도 그런 경향들은 보여지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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