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2013-2014

과학-종교 전쟁에 맞서는 태도(2014): '재현 갈망의 집단화' 프레임 피하기(2024)

‘과학’의 이름을 걸고 종교와 싸우는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는 체제 과학은

두 가지 점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하나는, 익히 알고 있듯이, 

과학이 기술과 결합으로서 이룩한 성취가 인간 공동체의 제어를 벗어나 

일부, 특히, 자본 운동을 자기화한 이들의 손에서 

지구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리, 객관, 보편의 리더로서 자신의 역할이 

근저에서부터 부정당하고 있는 점이다. 

상대주의적 세계관들이 폭팔적으로 증가해온 20세기를 거치며 

권력과 이성에 대한 비판은 

이제 많은 이들 손에서 능숙하게 처리되고 있다. 

체제 과학이, 

공동체의 제어를 받으면서, 

특정 일부가 아닌, 공동체 전체에 기여하는 도구로서 

역할 변화에 적극적이지 않는 한, 

현 실재론적 체제 과학의 자기 방어는 전방위적이다.  

 

이 위기에 대한 대응의 한 차원으로, 

체제 과학이 조직적으로 벌이고 있는 것이,

바로, 과학-종교 전쟁이다. 

이 전쟁은 체제 과학에 두 가지 이득이 있다;

반대편 체제 종교들에도 양상은 다르지만 마찬가지다. 

흔히, 전쟁으로 권력자들이 취하는 이득과 거의 비슷하다.

전쟁(또한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로)을 통해 

내부의 공격을 약화, 무시하는 효과를 얻으며, 

밖으로는 사회적으로 같은 수준에서 

다른 도구로 같은 역할을 하는 경쟁적 상대를 골라 공격함으로써, 

자기 존립의 정당성을 강화시켜, 부정된 자신의 지위를 버티는 것이다. 

말했듯이, 

내부의 공격은 상대주의적 과학관의 공격들이고 

외부에서 종교와 전쟁에 동원되는 이들은 

과학-기술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소박 실재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과학적 신앙심 깊은 열혈 무신론자들이다. 

이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은 

체제 과학 분과들의 현상 유지와 그들 연구비의 증액, 

그리고 자신들의 대중적지지 확산에 따른 정치적 영향력까지... 

하지만, 

이러한 과학-종교 전쟁으로 인해, 체제 종교는 

더욱 더 굳걷하게 체제 과학이 얻은 전리품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얻는다. 

체제 종교는 체제 과학보다 훨씬 더 유연하며 그 지지자들은 더욱 다기하기에, 

체제 과학 지지자들의 종교 공격은, 실상, 자기 지지자들의 결집용 이상의 의미가 없다. 

 

한 명의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 

이 전쟁이 우려스럽게 보이는 것은, 

두 체제 모두 고래부터 지속되어온,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급속히 약화되어온,

그들(종교와 과학)의 현실 권력이 재건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현실 권력이란, 

자라나는 아이들과 일상에서 상식으로 삶을 경영하는 이들의 자율적 권능을, 

사회적으로, 합법적으로, 인정된 범위에서, 즉, 구조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권리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구성하며, 

그들이 구성한 지식은 진리 기준보다는  유용성과 확장성에 따라 평가, 가늠된다는 것은, 

그 근저에 대한 이론적 입장이야 어떠하든,  설왕설래 하며 실체적으로 확산되고 있기에, 

자율적 권능을 지진 개체로서 주체에 대한 존중은 이제 하나의 상식으로 굳혀져 가고 있다. 

여기에, 진리, 객관, 보편이 설자리를 만들기에는 자율적 권능의 반탄력이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다. 

이런 마당에, 

과학-종교 전쟁, 말인즉,  진리, 객관, 보편의 담자자, 선지자, 지도자를 자처하는 쌍방,

실재론적 과학과 체제 종교의 전쟁이 확산되는 것은 

반대편 경향의 성장과 확산에, 특히,  자라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일정 제약을 가하는 흐름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전쟁은 하루 이틀 벌어진 일이 아니다. 

과거로 조금만 눈을 돌려 찾아본다면, 이는 반복되는 일과로 보일 수도 있다.

 

체제 종교 내부의 자기 반성과 자기 부정은, 

그 내부에서 일이니 해당 종교에 관계가 없는 이로서는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 발언, 행위가 

사회 구성원 한명 한명에 대해 그들 자율적 권능을 침해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는 

응당 대응하는 것이 누구든 마땅한 일일 것이다. 

과학을 진리 발견의 도구가 아닌, 

인간 삶의 바이어빌러티, 즉, 

적응성과 확장성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구성론자의 입장에서, 

종교 권력의 개개인의 자율적 권능에 대한 침해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 수준에 전개될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차원에서, 

개인의 자율적 권능에 대한 일정한 침해 권리를 정당화하는 

현재 인식 체제의 근본을 깨부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개개인들을 대함에 있어, 

그들 확립된 폭력적 체제와는 전혀 다른 

인간 상호작용의 문화를 생성, 확장, 확립시켜 나가는 일이다. 

전자는 특정 사회적 수준, 분야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특정 운명 지워진 이들의 역할이겠지만, 

후자는 평화를 원하는 모든 이들한테 

요청되는 일반적인 책무일 수 있다.

 

 그 일반적 책무란, 누가 되었든, 

그가 종교인이든 과학자든, 선량한 이든 범죄자든, 

자본가든 노동자든, 아이든 어른이든, 

그 어떤 구별 없이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서, 

<적어도 인연이 닿고, 함께 하는 삶과 일상의 상호작용 가운데>, 

그 타자를 이해, 구성, 응대하는 것을 너머, 

그 타자와 이해하기의 이해하기를 이루는 일이다. 

나의 개념에 동화시키는 이해가 아닌, 말인즉, 

왜 그 타자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무엇을 위해 그와 같은 생각에 기반한 행위들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와 같은 것들에 대한 이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그 타자의 나에 대한 이해로, 나의 타자에 대한 이해의 검사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들이 사람들을 만나는 목적이며,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는, 바로, 

인간의 인간적 활용이며, 

이해하기의 이해하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얽힌 인간 관계들에서 이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들 상호작용에서 평화는 항상 잠정적 휴전 상태에 불과하며, 

그들 사이 협력이란 마지못한 고된 시늉으로 그 결과는 언제나 파탄이다. 

그럼에도, 

이해하기의 이해하기가 성취될 수 있는 가능성 높은 곳도

바로 운명적으로 얽힌 상호작용 가운데 있다. 

필히 성취하지 못할 경우, 

다른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 

지금 당장 동원, 사용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말하게 하라, 들으라, 그리고 질문하라, 그리고 그 가운데 

자존을 회복할 수 있는, 그/그녀만의 자존을 찾도록,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경험을 가진 개체로서 자존을 찾도록 도우라. 

자율의 권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북돋아라.

그 권능을 북돋는 자가 당신임을 가끔씩 확인시키면서... 

그 자율의 권능으로 당신 세상이 이해되는 가운데, 

당신 세상은 진정 한 발짝 넓어지는 것이다. 

자존이 없는 자, 제거당한 자가 

자율의 출발 발단에 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나에게 관심을 갖도록 질문하게 하라. 

<어! 내가 알던 너가 아닌데... 너는 누구지? 어떤 사람이야? 

그런 생각은 이해가 안되는데... 그건 뭐지?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던 것이 너한텐 아니란 건데... 그럼, 

내가 알고 믿고 있던 것들은 정말 그럴만 한 건가?> 즉, 

회의론적 태도가 일어나게 하라. 

상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전제된 이후에 

당신이 노릴 수 있는 단계다. 

이와 관련해, 

당신이 가진 도구들이 많을수록 상대의 호기심은 커질 것이다. 

회의론적 태도, 말인즉, 

상대(실상은 자기 자신의 의견, 판단, 생각)에 대한 진정한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상호간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각자의 이해하기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종교 전쟁의 원형이다. 

 

전혀 만난 적이 없던 자들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맨 처음 보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한테는, 

그 자체로 경외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해하기의 이해하기에 실패하고 

각자가 믿는 것들이 진리, 참이라고 믿고 

상대가 틀렸다고 경시하는 순간, 

그래서 

상대는 세상에 악이라고 단정하며 

서로 나눌 수 있는 일상의 협조마저 끊기는 순간, 

잔혹한 전쟁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전쟁을 자양분으로 삼아 사는 자들이 있다. 

세상을 폭력에 기대 경영하는 실재론적 합의체의 지도자들이다;

 

 

이 지점에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한 편이 떠나거나 일방적으로 거짓 항복을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거짓 항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이해하기의 이해하기가 실패하는 대개의 원인은 

어느 한쪽이든 강력한 자존을 내걸고 시작하는 경우다. 

그러한 자존이 깨지거나 무너지지 않은 한, 

전쟁의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이런 사람 또는 집단과는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에 익숙하다;

서로 잘 지내기 위해 침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잘 지내는 것이다.

명시적으로 확립된 사회적 권력을, 이론적으로 옹호, 행사하는 이들과

일반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눈과 귀로 알아볼 수 있도록 물리적 경계와 방벽들이 쳐져 있다. 

반면에, 

그러한 경계와 장벽에 개의치 않는 물적, 지적, 능력을 소지하고 

나름 관대한 에고이스트들은, 

가벼운 상호작용으로 알아보기 힘든 이들이다. 

여하튼,

오랜 경험으로 판별할 능력을 얻기 전까지는 

적어도 이해하기는 시도될 수밖에 없다.

 

과학자 집단에도

그 어떤 종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이가 할 수 있는 처신이란, 

실재론적 태도를 취하며 진리 비슷한 것으로 압박당하는 상황에서, 

믿음이 넘쳐흘러 복음과 깨달음을 전하는 것에 너무 열성적인 나머지 슬슬 밀어 부쳐지는 상황에서, 

최선은, 그 자리를 피하는 일이다. 

압박하는 전문가, 슬슬 밀어붙이는 신앙인을 

그 집단에 속하지도 않은 이가 

이해하기를 시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까워지는 것은 이해하기가 시작될 수 있는 계기가 되며, 

이해하기의 이해하기가 시도될 수 없는 경우, 

늦게 피하면 상처가 크며, 이때, 

방어적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상 불가피한 방어적 상황에서 전쟁을 피하고 

그에 임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대비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 깊이와 대하는 태도를 넓혀가야 하는 것이다; 

이해의 깊이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반성의 깊이요, 

대하는 태도란, 극심한 약물 금단 증상을 겪고 있는 이가 

‘저기 멍멍이가 날아간다’고 말할 때, ‘미쳤군’이라 말하지 않고 

‘어떻게 나는데?’하고 질문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실제 상황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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