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2013

이솝 세 번째 이야기: 개와 그림자 - 무지, 무식의 노예

최고로 소중한 것으로 한 알의 옥수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독재의 근원인 권력을 응대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이솝은 누구한테 자신의 우화들을 들려주고 있는가? 세상의 주인 노릇은 못하지만, 당신 자신의 주인이기를 원하는 당신, 노예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다. 당신 자신이 세상의 주인에 속하는 이라면, 이솝의 우화는 참으로 듣기 거북한 것들이다. 우화는 하나하나 노예들의 자각을 일깨우는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개와 그림자 우화는, 어디선가 얻은 한 덩이 고기를 입에 물고 개울가 다리를 지나다 물 속에 비친 또 다른 한 덩이 고기를 문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그걸 탐내다 입을 벌리는 순간 입에 문 고기는 개울에 떨어뜨려 잃어버리고 물 속의 고기 또한 사라져버린 이야기다. 그리고 ‘그림자를 쫓다 실체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 라는 금언이 첨가된다.

이 우화의 주인공은 개다. 개가 뭔가? 주인한테 충성하며 삶을 이어가는 노예 가운데 똑똑한 축에 드는 관리인, 마름 같은 존재다. 양은 고기를 먹지 못하고 늑대는 풀을 먹지 못한다. 하지만, 개는 이도저도 다 먹는다. 여하튼, 이 우화의 주제는 자기 분수를 아는, 즉, 지분(知分)이다. 완벽한 지분이란, 자기 자신을 최소 형식에서부터 최대 형식까지 분명히 알아차리는 일이다. 완벽한 지분은 완벽한 깨달음이다. 노예한테 그걸 바라다니! 

시킨 일만 하면 되는 노예에서 나름 자신을 자각하는 단계에 이른, 그러나 여전히 노예인 이들한테 주는 삶의 지침이다. 자신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신의 깜냥과 그 깜냥이 통하는 여건, 즉 제약들을 알고 행한다는 것이다. 즉, 삶이란 이펙티브한, 실효적인, 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할 수 있다와 없다’에서 더 나아가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수천 년 가야 바뀌는 것과 같은 제약들을 바꾸고자 수십 년 개인 인생을 거는 이들이 역사에서 항상 있었다. 그들이 빠진 함정이란 실상 주인으로서 자신을 막 자각하려는 이한테 세상의 주인들이 던져준 그들 만찬에서 즐기는 환타스틱한 담론 조각들이다. 

개는 주인이 편히 앉아 고기를 즐기는 장면들을 보았고, 또한 고기들을 계속해서 먹을 수 있는 만큼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연히 얻은 고기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지 않고 물고 편히 먹을 데를 또는 숨겨놓을 곳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그림자를 만났다. 그 개한테 그 그림자는 우리가 보는 것처럼 접근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 고개 숙여 물기만 하면 제것이 되는 그런 것이었다. 저것까지 내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나도 주인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입은 주인도 하나 개도 하나지만, 불행히도, 개는 자신이 부릴 개가 없었다는 거고, 주인은 부릴 개나 노예가 있어 먹는 입은 하나지만 먹고 축재할 것들을 물어올 입과 손이 많은 괴물이라는 걸 개가 깨달을 턱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논리적 사고를 갖기도 전에 가르치는 것이 인과적 틀이다. 지 깜냥으로 지를 둘러싼 제약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할 수 있고 그 제약들을 돌파할 깜냥을 확장 창조하는 배우기보다는 어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밑에 깔고 인과적 질문들을 던진다. 주인으로서 양육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그림자를 쫓아가도록 하는, 개새끼 교육인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내가 만약 누구 누구라면.... 하는 환타지와 스타들의 그림자를 쫓게 하는 사악한 문화적 환경에서 주인으로 자라길 바라는 건 그야말로 내일 당장 한중일 세 나라의 원전을 철폐하겠다는 뉴스를 바라는 것보다 더 절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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