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2013

이솝: 늑대와 양: 호구로 살지 마라!

이건 이솝의 두 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는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웠다. 이제, 당신은 권력과는 거리가 먼 존재다 이리 생각이 들것이다. 지시와 명령보다는 대화가 타자와 상호작용의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 당신한테, 이솝은 권력자를, 그것도 당신이 제어나 통제 수단을 전혀 갖지 못하고 상대해야 하는 권력자, 즉, 독재자를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오늘날, 권력이란 과거와는 달리 직접적 무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을 넘어 훨씬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들에서 작용하고 있는 확립된 체제로 기능하는 특정 지위의 기능을 가리킨다. 시대를 막론하고, 해당 권력이 해당 영역의 구성원들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과정이 배제되거나 무력화되는 경우 그 권력은 바로 독재로 정의되는 것이다. 실상, 구성원들의 직접적 제어, 통제를 상실하면 그 권력은 이미 독재와 다름없다고 보면 된다. 권력자가 왕도정치나 플라톤적 철인정치를 펼치고자 하는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그 권력의 본 모습, 독재는 가면을 바로 벗고 나온다. 

이야기는 봄날 언덕 위에서 낮잠 자고 있던 늑대가 아래쪽 냇가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물먹기 시작한 양을 발견하고는 저녘거리로 여기고 양을 붙잡을 핑계거리를 궁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떻게 꼬여 엮어서 긴장을 이완시키고 가까이 다가오도록 한 다음 먹어치울 것인가? 

늑대는 양한테 크게 소리치기를, “감히 내가 마시는 물을 흐려 놓다니!”.... 이런 말도 안되는 시비를 걸어오는 순간, 보통은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상대가 힘쎈 강자인 경우 억울하다는 식으로 항변을 시작한다. 양 왈, “메에 주인님 메에”,“윗물이 흐려지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물은 당신 쪽에서 제 쪽으로 흐르고 있는 뎁쇼.” 

늑대가 그걸 몰랐겠어요? 우리는 통상 독재자들을 막무가내식 무식한 이들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선동가들이 오래 전부터 일반 사람들에게 통용시켜온 잘못된 상식이다.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즉, 독재를 유지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대화-비슷한 것들을 하면서 그들이 합리적인 양 모양새를 취하고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들과 합리적 대화와 합리적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대일 수 있다는 거짓 믿음으로 지속적으로 위장한다. 하나가 논파, 격파 당한다 하더라도 상관 없다. 바로, 또 다른 시비거리, 혹은 그물은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는 거니까. 

늑대 왈, “작년 이맘 때 넌 뭐땜시 나를 욕했지?” 이제는 권력에 복종하는 모양새를 파악하고 바로 지배-예속 위계를 활용해 공격한다. 이 역시 정당한 근거나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 공격에 대한 약자의 방어는 약자의 기력을 약화시키고 약화된 기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재차 또 다른 시비거리고 괴롭힐 것이다. “전 그리했을 수가 없네요”, 양은 자신의 합리적 논파를 자랑스러워하듯 말했겠지요, “전 아직 6개월 밖에 안됐거든요.” 그러면서, 양은 위험를 인지하면서도 그 상태가 별일 없이 계속되리라는 자기-만족적 믿음을 갖게 되지요. 이런 믿음을 뜻하는 “complacency”라는 단어로 요즘 거품 경제의 호구들의 맘 상태를 지칭하기도 한다. 

독재자, 또는 호구를 잡아먹는 사기꾼은 때가 되면 이제까지 합리성과 협약, 그리고 공존을 표방하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상관 없어”하면서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며, “욕한 놈이 너가 아니라면 네 애비였구먼” 하고 달려들어 불쌍한 어린 양은 덮친 다음 먹어치우기 시작한 것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때가 늦는 법. 어린 양은 죽기 직전 힘겹게 숨을 내쉬며 “그 어떤 변명 또는 이유도 독재자한테 이용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주의의 과정이 결여된 상태가 확인된 경우, 약자는 권력을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가? 강자 혹은 권력자의 자비를 바라며, 그가 왕도정치나 철인정치를 구현하기를 학수고대하며 그들 독재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고 고쳐져야 한다고, 자신은 변함없이 선의의 위치에서 제몫을 하고 있다고, 자신들의 아비들이 살았던 시대와는 다른 보다 자유로운 시대에 제 할 말은 한다고, 새로운 네트워크의 출현으로 문제를 급속히 공유하는 이들끼리 공동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여긴다. 

이상 모든 것들에 대해 권력자, 독재자가 두려워할 줄 아는가? 천만에 만만에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의 본 모습, 즉, 그들이 펼쳐논 그물의 얼개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 그 그물의 얼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완벽한 무시, 무관심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강력한 저항이다. 전자는 그 그물로부터 멀리 피하는 것으로 자신들에 적합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창조적 삶의 양식을 펼치는 것이며, 강력한 저항은 ‘피할 수 없을 때’ 생사를 걸고,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는 것이다. 이 둘 이외에 권력자, 독재자가 두려워할 건 없다. 왜냐? 기생충들한테 숙주가 제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거.... 그건 곧 그들의 죽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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