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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2013

이솝우화 네 번째: 사자의 몫 - 주인의 조건

이솝우화 네 번째: 사자의 몫 

맘이 맞아 함께 일했던 기쁨은, 이후 경험한 이한테 유토피아적 공동체에 대한 경험적 원형을 제공할 것이다. 여기서, 맘이 맞는다는 건, 각자의 깜냥을 알아 존중하고 일의 목적, 방법, 과정에 대한 각자의 이해하기를 상호 이해 조정하며 몸으로 손발을 맞추는 일이다; 아울러, 일의 과정과 결말에 있어서 상호신뢰로 서로를 보살피고 그 보상에 있어서도 공정하리라는 믿음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일의 과정에서 상호신뢰와 보상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자기 공동체에 당연한 것으로 주어져 있으며 작동하고 있는 한, 공동체의 개별 구성원들은 자신을 ‘이기적 개인’으로 전제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을 ‘경쟁자’로 상정하여 매순간 최대의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게임전략’을 고안하는 데에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어진 현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적 나날의 연속으로 조성된다. 마음 속에 원형으로 박혀 있는 공동체에 대한 아이디얼은 실제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 매번 부정당하면서도 실제 공동체 비판의 준거로, 상처당한 자신을 위로하는 가상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이것이 고기를 먹을 수, 말인즉, 권력을 탐할 수 없으며 지분(知分)을 아는 대다수 양이 취할 수밖에 없는 이상과 현실 사이 처한 모순에 대한 일반적 대응이다. 

게임이론의 전제는, 말한 바, ‘철저한 이기적 개인’이다. 배신과 협력의 선택, 그리고 배신에 대한 보복을 전제로 전개되는 게임에서 협력이 가능할 수 있다는 이론 전개는 약자보다는 강자를 염두에 둔 이론이다. 배신에 대한 보복은 그것도 즉각적 보복은 강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이 이론은 강자들이 자신들의 방식, 즉 게임전략을 공동체 또는 사회에 규칙으로 확립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른바, 지적 통치가 확립되는 것이다. 이 또한 현실의 일부이지만 아이디얼이며, 실상은, 방어할 수 없는 자한테는 언제라도 그 틈에 냉혹한 배신의 칼날이 꽂힌다. 

한 알의 옥수수의 소중함을 챙기던 수탉에서 독재 권력의 본성을 이해하고 그에 응대하며 사는 영리한 양으로, 이어 당신은 그림자, 즉 객관성이라는 망상을 쫓지 않고 당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실효적인 것들로 삶을 꾸려가는, 말인즉, 지분(知分)을 아는 깨달은 개에서 이제 사자와 맞장떠야 하는 여우, 쟈칼, 늑대의 입장에 서게 된다. 사냥은 당신의 본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 사회에서 사는 한 당신은 고고한 학 또는 양처럼 살 수는 없다. 당신이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당신은 사냥과 전쟁, 말인즉, 경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들에 처할 수 있다. 분명 한 수 아래인 당신이 사자와 맞장뜰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우선, 이솝이 전하는 우화로, 사자가 여우, 쟈칼, 늑대와 같이 사냥해서 숫사슴 한 마리의 숨통을 끊고, 어떻게 나누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지. 그때 사자가 외치는 거야. ‘1/4은 네꺼야 알지!’ 이후, 셋은 이 전리품의 가죽을 벗기고 넷으로 나누었어. 이어, 사자는 시체 덩어리들에 발을 올리고 선언을 하는 거야: ‘첫째 건 야수의 왕으로서 내 몫이다; 둘째 건 중재자로서 또한 내 몫이다; 셋째 건 추격했던 노고로서 내 몫이다; 그리고 넷째 건, 음,,, 말하자면, 감히 내 몫에 숟가락을 얹으려 하다니!’ 분배가 종결되자, 꼬리를 말고 낮은 소리로 여우 왈, “대단한 성취에 함께 땀을 흘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성과를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제국의 시대에, 전쟁과 착취가 일상인 시대에, 모든 경쟁 조직들이 전세계를 무대로 전리품을 챙기는 시대에, 당신은 풀먹는 영리한 양으로 지분(知分)을 아는 해탈한 개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현실은 앞으로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내에는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또한 원튼 원치 않튼 그러한 조직의, 사회의, 제국의 일원으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했으며 그 전리품의 몫을 나눌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당신은 사자가 말한 의무를 갖고 있어야 한다. 첫째, 법과 질서의 창조자이자 수호자로서 왕의 역할을 당신은 하고 있는가? 둘째, 전리품, 말인즉, 세입과 지출을 어찌 나눌 것인지에 대한 중재자로서 역할은 하고 있는가? 셋째, 당신의 노고을 분명히 밝히고 확인시킬 능력은 갖추고 있는가? 넷째, 당신이 한 역할의 대소를 불문하고 공동체 일원으로서 동등한 자격을 있음을 주장할, 그 주장이 힘으로 부정당하지 않을 장치를 가지고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답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당신이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공동체의 모든 사안에 직접 참여할 때만 이는 가능하다. 이를 통상 민주주의라 칭한다. 자기 몫을 찾아먹는 시스템이다. 

실상, 현실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극도로 제약받는 상황이다. 공동체의 규모, 사안의 복잡성과 전문성, 의사결정의 급박성, 등등이 제약들로 작용한다. 해서, 우리는 대의제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며 한번 꺽인 민주주의, 즉, 대의민주주의를 사회적 의사결정체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꺽어진 민주주의에서도 반드시 유지되어야 할 것들은 셋째와 넷째, 즉, 당신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일정 역할, 노고를 들이고 있으며, 동등하게 응대받아야 한다는 조건들이다. 말인즉, 내 몫이 있다는 것이니 내 몫을 정치가, 관료, 전문가들 맘대로 처리하지 말고 사회의 개방된, 합리적 여론 형성 과정과 절차들에 맞게, 그리고 소수라 할 지라도 어떤 이도 몫을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는 것을 조건으로 권력을 위임한 것이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는 권력의 위임 조건이 붕괴되면 독재로 즉시 전환되는 것이니 구성원들이 대의제가 아닌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다면, 위임 조건 붕괴 즉시 위임을 해제하고 권력을 소환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 과정이 순탄하게 지켜지는 나라, 공동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 까닭은, 아마도, 구성원들이 직접 제어 통제할 수 있는 규모 이상으로 공동체가 크다는 근원적 문제보다도 구성원들의 자기 몫에 대한 자각, 그에 이은 주주로서 역할에 대한 이해 부족이 더 클 것이다. 민주주의의 확립이란, 민주주의를 지킬, 사자의 힘과 무대뽀를 제압할 공동체 성원들의 연합된 무력과 합리성을 구성원 다수가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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