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2013

버릴 것(2): 기도

Renunciation  2

"기도"

원하는 걸, 누군가, 그 어떤 존재가 해주었으면,
우연이라도 그리 되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체의 행위.

필연, 우연을 가리지 않고 바라는 일체의 행위는 

자기 본위로 이 세상과 온 세상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당신 뜻대로 하소소' 하면서 '그럼에도'를 추가하는

도둑놈 심보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가 지시하는 바는,

생기는 대로 먹고, 받은 것은 반드시 갚고

우연히 발생한 이득은 내 것이 아니고,

우연히 발생한 손실은 내 감당할 몫이어야 한다.

 

기대란 현재 지각상황에서 

목적한 바에 맞는 현상, 또는 지각물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 주체는 

그 기대에 적합한 사고와 행위를 해당 상황 속에서 행해야 한다.

상황은 항상 똑같지 않다.

유사한 기대와 행동이 같은 결과를 빚는다면,

상황들은 비슷한 것으로 처리된다.

한두번의 성공은 성공할 것같지 않은 다른 상황에서도

반복적 실패에도 같은 기대와 행동을 반복하게 만든다.

상황이 달라지면, 기대도 조정해야 하고,

다른 사고구조로, 즉,  다른 뷰에서도 보아야 하고,

행동도 좀 더 정교하고, 다른 행동양식을 개발도 해야 한다.

인간 발달의 자연스런 과정이다.
 

하지만, 이것을 가로막는 것이 종교며, 

바로 기도와 설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 의례들이다.

기도에는, 우선, 기대에 적합한 현상, 지각물을 제공해주는 뭐가 있다는 것이다.

뭐가 있것지.. 뭔지는 몰라도...근데 그 뭐가 맘이 있다는 거야...

그래서, 기대하기, 생각하기, 행위하기, 주체가 별짓을 하던

일단 실패란 걸 하면 뭐 맘에 안들어 꽝이라 상상하는 것이다.


그 뭐를 믿기 시작하면, 욕심을 좀 접고 함께 나누고 이러는 기 보통 사람 생각이야.. 

하지만 이러기보단 지가 원하는 건 일단 얻어야 돼... 그리고 반성,,, 개나 줘버려... 

반성을 통해 다른 사람 입장이나 처지를 생각하고 세상이 그리 돌아가게 만든 바, 

자신도 그 세상의 일부였음을 깨닫는 일은 너무 먼 일이지,,, 

 

가끔씩 종파들에서 그런 말 하는 멋있는 자들은 있지만 

그 뭐는 몸도 맴도 없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란 소리는 절대 대놓고 못해... 

 

행동 수정, 새로운 문화 행동... 

왜 저 밖에서 기대에 적합한 걸 주는 뭐가 있는데 그 뭐 비위를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지... 

한사람 한사람 처지 이해하고 협력하고 조정하는 것은 너무 짜증나.... 

줄 확세우고 분류를 확실하게 해서 관리를 잘하면 됐지.... 

이런 게, 그 뭐 비위 맞추는 일 아니겠어... 

그 뭐란 거이, 실상, 이 세상의 그 누구들의 체현 아니 것어...

하니, 아조 종교적인 신자들한테 깨달았다 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번쩍이는 외투들이지...
 

이어, 기도와 결합된 종교적 설교에는 기대를 하향 조정토록 하는 양상이 있다.

세상만사 겪을만큼 겪은 이들한테, 더는 기운이 남지 않은 이들한테,

새로운 관점을 배우기도, 그렇다고 새로운 사람과 만나 이해, 협력, 조정을 하며,

자신을 변화시킬 용기마저 잃은 이들한테는 당연히 해야 할 말이다.

욕심을 이제는 접어야지... 그래야 남은 인생이라도 편히 살지 않겠어...


그러나 생기발랄한 젊은 청춘들한테는 불쉿이다.

그리고 이런 기조가 문화 전반을 횡행하면, 사회적 활기를 떨어뜨린다.

이런 기조가 어떤 이들한테 더 자주 반복적으로 행해졌을까?

당근 가진자, 권력자보다는 없는자, 저항하는 자들한테 였겠지...

그들한테 생각하는 힘, 새로운 행위 양식의 창조적 활력을 주기보다는....

유교는 권력자들을 북돋고,,,,불교는 없는자, 저항하는 자들을 잠재워 평안을 주었고...

기독교는 '뜻대로 하소서' 하면서 구복적 패거리 경쟁 문화를 일반화 시켰지.

"참 잘했어요"


나아가, 이들 종교들이 기도와 같은 의례로서 행한 것은,

새로운 상황에서 변화와 다양성의 창발을 가로막는 역할이다.

이를테면, 제사는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한 조상신과 귀신들을 맞이하는 바로서는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의례지만, 여전히 가부장제 유지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온 국토가 일년에 두 번씩 전쟁을 치른다. 제사를 안지내는 집까지도 덩달아서리...

뼈다귀만 남은 의례라 할지라도 그 의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행위양식은 생겨날 수도 북돋아질 수도 없다.

다른 생각을 같은 시공간에서 이리저리할 수 있지만,

다른 행동은 같은 시공간에서 동시적으로 할 수 없다:

술취해서 한 짓이 아니라면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
 

해서, 기도란 

상황, 기대, 사고, 행동이라는 일련의 적응적 과정에서 나타난 일탈로,

일련의 과정에 적합치 않은 기대를 반복적으로 행하는 편집증 증세며,

창조적 사고와 행위를 가로막는 변태적, 반사회적 행위다.
 

* 반성을 위한 명(明)상과 실패를 경외로 받아들이는 명(冥)상을 기도와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진정한 종교인이 이를 기도로 여기고 행한다면,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확립된 종교와도 연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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