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장애와 유익함이 수행에 미치는 영향
2013

버릴 것(1): 권력 의지

Renunciation  1

 

첨부터 악마로, 천사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몇 가지 필요한 반사동작들만이
그/그녀가 가진 전부였으리라.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동작들의 성공에 따라
그 동작들을 확장시키면서
그 동작들과 하나가 된다.

동작들의 확장에는 필히 새로운 상황 속
보완적 동작들의 창조를 필요로 한다.

어찌어찌 창조성들이 생겨나고
살고자 하는 의지는
새로운 지평선 위에 선다.
사는 것을 너머
외로운 영혼이 위로받을 수 있음을...

꿈이지만 영원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은
이내 삶의 의지를 권력의 의지로 바꿔친다.

창조성은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도구...
가보지 못한 길을 더듬어 찾아가는 바...

어찌어찌 살아남은 성공도,
아무리 기발한 창조물도,
그저 그것일 뿐,
부러운 시선들의 환호도,
그 환호에 걸맞는 화폐도,
그 화폐와 교환되는 권력도
생존의 필수품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영혼이 위로받기 위해
다른 영혼을 부르는 미끼들이다.
심하게 아픈 자가 남을 돌볼 수 없듯이 
외로운 영혼들끼리 위로받을 수는 없다.

부러움에서 환호로, 다시 화폐로, 그 화폐에서 권력으로
창조성은 더 이상 삶의 의지에 봉사하지 않는다.
오직 권력의 의지에 봉사할 뿐...
오늘날, 창조성은 가학적이다.

악마 본연의 모습이다.
그/그녀한테,
진실, 일관성, 부끄러움, 약자에 대한 배려는
가식으로서도 더 이상 불필요한
권력 의지 아래 엎드린 하챦은 종복들의 윤리일 뿐이다.

우리가 살면서 뿜어내고 있는 것들,
낯섬에 흥미롭기보다는 아름다움에 취하기,
진실을 찾기보다는 진리에서 머무적거리기,
당당히 균형을 찾기보다는 착함 후 부끄럽기,
악마는 이 모든 것으로 산다.
그래서 독에 찌든 채 사람으로 사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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