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에서 보며 본 것을 제자리에 두기

고든 파스크의 '상응, 여론, 일관성, 그리고 민주주의 파괴'

일치, 여론, 부합, 그리고 민주주의 파괴

 

고든 파스크

University of Amsterdam

Faculty of Andragological and Educational Studies

 

역자: 이 논문은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새로운 전망들(자기-조직, 자율, 그리고 연결주의), 1992”의 ‘사회적 이슈들’편에 실린 것입니다. 이 책은 ‘자기-조직과 복잡성’, ‘인식론적 이슈들’그리고 ‘사회적 이슈들’에 관한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책에는 파스크의 또 다른 논문 ‘상이한 종류의 사이버네틱스들’이 서문으로 실려 있기도 합니다.

 

초록

 

상응(相應), 여론(輿論), 정합(整合) 진리 값들은, 특히 사회 영역에서는, 부작용들이 있음을 논합니다. 이러한 거친 범주들을 정교하게 다듬은 것들을 검토하며, 아울러 ‘의미에 대한 반복적 정련’으로 간주된 ‘해석학적’진리와 기원이 같은 동적 정합(dynamic coherence)과 같은 새로운 해석들이 논해집니다. 동적 정합은 그 범주들에 앞선 그밖에 진리 형식들의, 특히 해석이 행해지는 특정 분야들에서, 바탕을 이루는 것임이 주장됩니다.사회적 함의는 민주적 조직들이 살아남고자 시도하는 한도 안에서 숙고됩니다, 특히 ‘통합(統合)’과 ‘획일(劃一)’사이에 놓인 차이가 고찰됩니다.

 

 

*상응(相應)이란, ‘둘 이상의 어떤 것들이 일정한 관계로 연결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응(對應), 부합(符合)과 같이 쓰일 수 있다.

*여론(輿論)이란, 글자 그대로, 수레를 탈 수 있었던 이들, 한 사회의 엘리트, 부유한 자, 권세가들의 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일정한 형식적 절차를 거쳐 ‘사회 대중의 공통된 의견(consensus)’이란 뜻으로 치환되어 통용되고 있다.

*정합(整合)이란, 통상,‘모순 없이 가지런히 들어맞은 상태’를 지칭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특성’을 뜻하는 ‘일관성’으로 통상 번역되는 영어 ‘coherence(무언가 하나를 조성하는 모든 부분들이 서로 잘 들어맞는 상황)’에 적합한 용어로 보이며, 여기서는 ‘정합’을‘전체의 모든 구성 요소, 부분, 상황, 의견, 사람들이 함께 모순 없이 잘 들어맞는 상황’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계합(契合)이나 결취(結聚)가 고려될 수도 있으나 거의 쓰이지 않으니 배제한다.

 

*통합(統合)이란, ‘둘 이상의 조직이나 기구를 모아 하나로 합침’을 뜻하기에 영어 ‘unity: (상이한 부분들이 함께 일하거나 합의를 목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기 위해 참여한 상태’에 적합한 단어다. 반면, 항상 모든 부분에서 똑같은 변화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uniformity는 ‘획일(劃一)’로 번역한다. 하지만, 통일(統一)이란 갈라진 것들을 하나로 합침이라는 뜻으로 통상 영어 ‘unification(사람, 사물, 나라의 부분들을 단 하나의 단위로 합치는 것)’에 가장 잘 어울린다.

 

 

1. 서론

 

말할 것도 없이, 진리들은 많고 다양합니다. 예를 들자면, 절대적 진리, 사실로서 진리 그리고 분석적 진리들이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단 하나의 구분 유형은; 조리 있는 논쟁, 합의 그리고 불일치에 대한 동의에 적용 가능한 상응(相應)-진리(종종 사실-진리로 불림), 여론(輿論)-진리(다수결 투표들과 그 비슷한 것들) 그리고 정합-진리들입니다. 정합-진리는 또한, 그 동적 형식에서, 우리가 테일러 방식으로, 이를테면, ‘의미의 반복적 정련(精鍊)’을 시도하는 경우, ‘해석학적 진리’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들 범주와 이들이 적용되는 괴이(怪異)한 분야들 사이에는 엄청난 혼동이 있습니다. 정합-진리와 그것의 동적 해석 그리고 해석학적 진리는 논리학에서 그 무엇보다 앞서는 것이며, 그것의 실제 구동(驅動)은 여타 유형들에 논리적으로 앞설 뿐만 아니라 존재 가치 또한 갖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조직적 밀폐”와 같은 개념들, 일반적으로는 P-개체화 그리고 생물학 분야에서는 ‘오토포이에시스’에 대한 이해에서 더없이 중요합니다.

 

이에 대한 흔한 몇몇 잘못된 이해들로 고귀한 여인, 민주주의에 대한 잦은 반복된 침탈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사전(辭典)에 쓰여진 바, ‘인민에 의한 또는 그들이 동의한 집행관들에 의한 인민에 대한 통제’를 의미합니다; 너무도 빈번하게, 정확히 이런 뜻이 아니란 건 실상이다. 이러한 타락에 대한 주요 이유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자주 지연되며, 변증법을 자주 쓰는 그리고 격렬해지기까지 하는) 논쟁이 있고 난 이후에야 부상하는 합의(合意)라는 ‘정합(整合)’을 ‘여론(輿論)’이라는 단순, 다수 논리로 대체하는 일입니다. 사안이 심각해지는 것은, 강요된 선택을, 이를테면, 투표로 정할 때마다, 그리고 투표 과정이 통상 그러듯이 조작 가능성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여기서 조작이란 투개표 과정의 표차-조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상응-진리

 

상응-진리, 사실성을 갖춘 것이기에 자주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일반적 동의와 정합-진리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특히 과학이 이에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진술이 상응-진리로서 (말인즉, 하나의 가설을 공표하고 있는 명제가 그 사실 증거에 상응하는 진실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바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 가설이 검사할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 가설에 대한 적절한 검사가 고안되었거나 고안될 수 있다는 바에 대한 동의, 승인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이러한 것들은 사회적 사안이자, 좁게 잡아, 심리학적 사안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논쟁, 대화, 변증법 또는 어느 정도는 통렬한 비난까지 수반합니다. 이 과정은, 곧 보이겠지만, 정합-진리의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일은 운이 좋아 우연히 잘 발견하게 되는 원석기(原石器)-돌(칼 같은 모양의 돌) 발견하기와 같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재수 좋은 발견이든 원석기-돌이든 내가 저버리고 싶지 않다할지라도, 그것들은 과학의 핵심 성분도 평범한 지혜에서도 우선되어야 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가설들로 조성된 이론의 일부로서 하나의 가설이 검증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동의되었다고 가정(假定)합시다. 또한, 검증 방법, 도구들, 등등이 동의되었다고 가정(假定)합시다. 그럴 경우, 그 이론이나 다른 이론의 일부 또는 전부를 폐기하도록 하는 결정적 종류의 가설의 허위화(虛僞化)를 고안하는 ‘포퍼 유형’ 못지않게, 더욱 일반적으로, 그 가설이 중요한 측면들에서 증거와 일치, 상응하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과학의 법칙들, 더 일반적 법칙들, 또는 실제로 유용한 원리들을 정식화시킬 수 있습니다 (‘컵을 손에서 놓으면 컵은 떨어진다’와 같은 경우, 우연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중력’의 힘으로 그럴 것이라 가정한 다음, 아마도 ‘중력은’반복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g로 알려진, 가속 상수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탁월한 것들입니다. 상응-진리가 다양한 류(類)의 동의나 정합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과 관련한 경계 그 이상으로 또 다른 경계가 필요합니다. 상응-진리는 흔치 않은 보물이며,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대체로, 특정 분야나 가능한 시공간 또는 담론의 영역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됩니다. 이렇다 하여, 실용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엄청난 그것의 가치가 낮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 이상의 ‘가정(假定)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역들에서, 과도한 일반화가 행해질 때, 이를테면, 통계적 방법들, 말인즉, 많은 것들을 이항 환원가능 관계들로 한정하거나, 더 나아가, 학생 때 하던 끈 연쇄 매듭짓기 방식에 한정할 때, 상응(相應)-진리는 그 과정이 조심조심 신중하게 진행되도록 압박(壓迫)합니다.

 

3. 그밖에 한계들

 

이러한 비평들 말고도, 그밖에 정말 특별한, 적절한 몇 가지 주의들이 있습니다. 참여자 A가 또 다른 참여자 B에게 던진 명령이나 질문에 이어, A나 B의 반응에서 복종이나 질문이 용납되지 않을 때 (역자: 이중구속 유발 조건일 때), 상응-진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A나 B는 한발 더 나아간 질문에 답할 수도, 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청과 애원과 같은 진술들이 비슷하게 잇따르겠지만 그들이 처한 갈고 닦은 조건들의 특성으로 훨씬 더 복잡해집니다.

 

유비(類比)를 지시하는 은유든, 알레고리(諷刺)를 사용한 이야기들이든, 그것들이 관찰된 과거 사건들의 (진술된 증거는 관찰자한테 의존하는 것으로서) 집합체들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Yes’/‘No’라는 상응-진리 값을 갖지 않습니다. 명령/지시, 질문,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에 대한, (말인즉, 그 고유의 논리적 특성이 필히 참신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 어떤 사건과 관련해 관찰자가 만든 진술에 대한) 상위진술(上位陳述)을 만드는 것은, 물론,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어떤 시점에 관계된 어떤 조건들이 D를 지시하자 A는 B한테 C를 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진술에 책임이 (또는, 판단할 수) 있는 ‘관찰자’가 또한 ‘D가 벌어지자 A가 B한테 C를 명령한 것, D가 벌어진 것, B가 복종한 것은 참(사실)이야’라고 단언하고 있는 그때, ‘명령 종료’에 대한 (마찬가지로, ‘질문 수용과 반응’에 대한) 관찰자의 상위진술은 참(사실)이라 말하는 것은 적법합니다. 그러나 이들 명령/질문-주고받기에 대해 행해진 진술(下位陳述)이, 그 자체로, 상응-진리 값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다수 과학 법칙들은, 수력학 또는 전기 같은 독특한 시공간(宇宙)에서 작동하는 똑같은 형식 법칙들과 관계된, 일종의 추상적 유비(類比) 시공간에서 확립된 상위진술들입니다. 이들 독특한 시공간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비슷한 구조일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과학적 법칙들이란 동형(isomorphism) 또는 일대일 대응일 것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그것들을 ‘실재하는’법칙이라고 또는 모든 시공간에 동일한 하나의 지표를 제공하는 그래서 모든 시공간(宇宙)을 하나의 류(類)로 환원할 수 있는 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실증주의적 입장에 접근하는 ‘환원론’에 다름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따라서, 사회 분야, 심리학 분야, 그리고 필시 여타 분야들에서 귀결된 대다수 결론들을 다룰 때는,(진실을 말하거나 사실과 일치하는) 상응-진리로 조성되는 말끔한 영역에서는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특히, 포고(布告) 또는 요구들을 건네거나 그것들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 개체 그리고 집단들에 대해 언급할 때,그와 같은 일탈(逸脫)은 필수적입니다. 다시금, 상이한 담론의 영역, 시공간(宇宙)들 사이 많은 틈들에 다리를 놓아야 할 때, 그와 같은 일탈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판명됩니다. 관찰자가 신령하지도 전지전능하지도 않는 상황들에서 (특히, 일상에서), 실상, 필요한 것은 상응-진리들 너머로 떠나는 어떤 여행임을 단언하는 것으로아주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 여행은 어디로 이어질까요? 정합(整合)으로 이어질까요? 아님 여론(輿論)으로 이어질까요? 아님 둘 모두를 만족시키는 쪽으로 이어질까요? 그것들은 항상 서로 양립할 수 있을까요?

 

4. 여론-진리

 

일종의 여론-진리라는 것은 어떤 일/사건에 관한 완전한 협정(協定)입니다. 더 통속적으로, 그것은 다수결의 문제입니다. (그와 같은 일/사건이 실상(實狀)이든 아니든, 또는 주어진 여건에서 그것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든)여론에 도달하고 결정짓기 위해 채택된 다수결 논리의 세부 사항들은 다양합니다. 철저한 다수결은 항상 최대의 여론-진리 값을 갖지만, 전체 또는 기권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또는 다르게 설정된 가운데, 찬성할, 반대할퍼센티지(%)는 개연성의 수치로 쓰일 수도, 혹은 최대 확률에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교착상태를 다루는 트릭으로 쓰일 수도, 혹은 몇 개의 당파들에 권력을 배분하는 것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여론-진리의 그와 같은 할당 아래 깔려 있는 몇몇 당연시된 가정들은 주시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선거에서처럼 일정한 기간에 걸쳐 행하는 투표가 여론 값을 결정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유용합니다. 한편, 다음 단편들은 아주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a) 투표 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아진 전혀 다른 개체들(사람, 대표, 또는 그밖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전제로, 어떤 경우든, 각자에게 주어진 한 표를 행사합니다 (투표가 동수일 때 의장의 추가 투표, 등등과 같은 변형들은 잘 알려져 있고 그 주된 요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b) 투표 기간(期間) 동안, 이들 개체들은 독립적으로 행위합니다. 그 동안에 투표자들은 서로서로든 그밖에 다른 시스템들과도 상호작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투표가 시작되기 전(前)부터 모든 종류의 논쟁, 증거 수집, 매체들의 영향들을 금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투표하기는 그와 같은 몇몇 방식들로 형성된 의견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면 적절치 못한, 혹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c) 채택된 다수결 논리는, 그것이 어떤 류(類)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 함수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공정하게 이행될 경우 여론 값을 결정하고 그것을 계산하는 데에, 통상, 산술의 고전 형식이 쓰입니다. 내 말하는‘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란 일렬로 늘어선 진리 값 격자(束)를 갖는 논리입니다. ‘엄격한’용법으로, ‘참’과‘거짓’이라는 종결점(終結點)들만이 관심사일 뿐이지만, (확률 논리) 선상(線上)의 많은 점들을 갖는, 또는 중점들을 갖는 격자가 있을 가능성도 상당합니다 (한편, 그러한 논리 시스템에서 미결(未決) 또는 적용불가 값은 중점 값이다.) 특히, 단순 lewis 논리에는, 또는 폰 라이트의 ‘deontic’논리에서 ‘alethic’와 대비되는‘deontic’값들에는 ‘가능성’과 같은 전혀 다른 종류의 진리 값은 없습니다.*. 이러한 제약이 각별히 중요한 까닭은, 이 제약을 사용함으로써, 조직적 밀폐, P-개체, 이와 유사한 것들, 그리고 정합에 대한 합의-값을 나타낼 때 필요한 (이를 위해서는 귄터 논리학 전체가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자기-준거’나 ‘실존’또는 ‘타자’, 또는, 일반적으로, ‘복소수’에 대한 불 아날로그와 같은 값들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펜서 브라운, 그린버그, 헬러쉬타인, 카우프만, 마투라나, 바렐라, 그리고 그밖에 많은 이들을 보십시오.

 

*단순 lewis, deontic, alethic 논리들은; 각기, ‘엄격한 필연성만’; ‘의무, 허용, 금지’; ‘필연, 가능, 우연’;을 각각 다루는 양상논리들이다.

*P-개체는 고든 파스크가 일관된 신념을 유지하고 있는 특정 개인 또는 일군의 사람들한테 체현될 수 있는 조망 또는 관점을 가리키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다. 여기서 P는 ‘"psychological"에서 따온 것이다. 많은 P-개체들은 한 사람한테서 나타난다.

 

나는 여론이 정당한 것임을 의심치 않으며 종종 행해질 수 있는 최선임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통상, 그것은 실제적이며 공정한 판단 유형이며 그밖에 다른 많은 유형들에 비해 선호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협정의 경우, 그것은 이상(理想)과, 유례없이, 일치할 것이며, 그 어떤 불평이나 애매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완전한 협정이란 좀처럼 맞닥뜨리기 힘든 것입니다.

 

협정이란, 문자 그대로, 규칙이라기보다는 예외에 속합니다. 그렇기에, 여론에 대한 잠재적 반대들을 밝히는 것은 유용하며, 그것들은 협정으로 주목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모든 가능한 분야의 최소 몇몇 분야에서 여론 시스템이 상응-진리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적절한 두 가지 예들이 있습니다.

 

5. 정합과 여론 시스템 사이에 있는 잠재적 차이들

 

두 전형 가운데 하나는, 근대 고도로 밀집된 개발 혹 미개발 세계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으로서, ‘민주주의’입니다. 정치적 양상이야 어떠하든, 그 원리들은 다르지 않고 권력은 (대개 알고 있듯) 수(數)에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와는 대조(對照)되는 바로, 고대 도시 국가나 의회에 모이는 오늘날 ‘에스키모의 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십중팔구, 맨-섬(Isle of Man)과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의회도 (겨우 일 년 정도 보이는 생겨난 날짜들을 아직도 결정 못했지만) 유사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으며) 있다고 봅니다.

 

또 다른 전형은, 전자와 비교, 대조를 위한, 과학입니다.

 

우선 민주주의를 살피며, 그 형식들을 적절한 사례들로 비교합니다.

 

근대 민주주의에서, 개표-수, 여론으로서 다수는 전적으로 중요하며, (최악의 경우) 4절의 (a), (b) 그리고(c)에 근거한 기준들만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를테면, 기표부스의 프라이버시를 걱정하며 투개표 과정과 그 철저한 공정성이 정말 진실한지 우려합니다. 이러한 우려는 전적으로 칭송받을 태도로, 제한된 투표 시간과 미디어의 공공연한 영향력으로 편파적 표심 형성이 문제시될 때, 특히, 그렇습니다. 이러한데, 투표할 시간 정도는 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여하튼, 투표를 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더욱 우선적 사안들에 고민이 집중되며, 투표할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일 수 있음에 나는 동의한다), 당연 독립적이며 합당해야 합니다. 대조적으로, 오래된 국가, 민주주의, 의회인 경우, 절차에 있어서 실제 제한을 두지 않고 논쟁을 하며, 참여자들이 전혀 독립적일 수 없는 지점인 (불일치와 그 이유에 대한 동의를 포함할 수 있는) ‘합의(合議)의 정합(整合)-진리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타 경우, 불일치에 대한 그와 같은 동의들은, 모임의 해산 이후에도 길게 계속될 논쟁을, 종종 변증법을 허용하며, 종종 조화(調和)에서 멀어지는 것까지 허용합니다.

 

다음으로, 통상 ‘체제(體制)’로서 (임레 라카토스 말로, 과학적 조사(調査) 프로그램으로서), 과학을 살펴봅시다. 수(數)의 민주주의가 창조성에 파괴적일 수 있다는 의견이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개표 결과에는 ‘저널 편집자들과 조사기관들의 승인’이 수반됩니다. 그러한 승인은, (목표에 힘을 쏟아 그 모든 존재-권리를 확보하는) 과학적 조사 프로그램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승인이 혁신적인 형식을 제거하거나 억누른다는 것은 명백하며, 아울러 그러한 승인은 또한 거의 일탈을 보이지 않는 비교적 관습적 지혜와 같은 선상에서, 해(害)가 없음은 물론, 대체로 완전히 버걱거리는, 어리석거나 전적으로 잘못 구성된 가설들까지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검증하려는 나쁜 습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흔한 경험과 비교하고 싶은 것은, 출판할만한 논문이나 자금을 제공할만한 제안들은 거의 읽지 않고 자주 퇴짜를 놓는 또래 편집자과 비교되는 작은 또래 그룹 세미나에서 벌어지는 혁신적인, 종종 변증법을 쓰는 논쟁입니다. 그러한 그룹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생겨난 정합(整合)은 곧잘 창조적 도약으로, 진정한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문구,‘씽크 탱크’는 그와 같은 함께 하기를 가리키고자 만들어졌습니다. 불행히도, 이 문구의 사용에는, 그러한 형식의 작용이 체제 질서에 부담을 초래하리라는 명백한 위협에 대한 제거 의도뿐만 아니라, 그 형식이 인류에게 제공할 희망까지도 동시에 제거하려는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여, ‘씽크 탱크’는 위험한 신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보고(報告)하거나, 설명, 정당화해야 할) 책임 관련 규범과 비용 대비 효과를 고려하면, (늦춰지더라도) 합당한 그리고 잘 짜여진 응답이 필요합니다. 과학에서 이러한 결과를 얻고자 시도되는 방식은 ‘위원회와 여론을 거쳐’ 그 응답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R &D 프로젝트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든, 과학에서는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트킨과 그밖에 사람들이 아주 엄격한 방식으로 보여준 것으로, 그러한 대다수 위원회 업무란 당면 문제와 관련이 없는 엉뚱한 언행 유포라는 점에서 잡소리들입니다; 이 잡소리 기능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그저 위원회 위원들과 관련 기관들의 지위를 추켜세우는 것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론-형성 시점과 관련하여 구조는 다르지만 척하는 외관에서는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한 주, 하루, 백분의 일초에 일어나는 중요 사건들은 왜 꼭 그 시간이어야 하는가. 아트킨과 다른 이들이 제기한 것으로,이를테면,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게 언제야?’또는 ‘로마가 도시가 된 게 언제지?’라고 질문할 때와 같은 식입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한껏 경의를 표하다, 그러한 ‘언제’에 백분의 1초, 백만분의 1초, 10억분의 1초의 뜻을 담아 물으면 한층 더 우스워집니다. 문제가 되는 건, 여론-형성 순간에 시점들의 상황을 정교하게 다듬을 경우 그 시간들은 더 이상 우스워지지 않게 됩니다. 정합(整合)이 갖춰지는 순간들이란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과학에서 중요 순간들은 정합을 띠는 상태를 지녀야 한다는 기대를, 사람들은 갖고 있습니다.

 

6. 정합-진리와 그것의 동적 형식들의 특이 값

 

정합-진리는, 통상 합리적인, 가설들을 촘촘히 결합시키는 것과 관련됩니다. 레셔는 진리 정합 이론에서 명제와 단언-진술들을 항으로 해서 논했습니다. 그 후, 인지적 관념론에서 레셔는 명제와 기술(記述)들의 생성(生成)에 적용 가능한 동적 연장(延長)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테일러의 ‘해석학적 진리’, ‘의미에 대한 반복적 정련’에, 똑같지는 않지만, 근접한 것입니다. 테일러의 관념은, 한 사람의 또는 참여자들 사이의 진술, 이야기, 사건으로 그 ‘무엇’의 정련을 반복적으로 계속하는 가운데 불가결하게 야기된 동적 특성으로, 시스템과 관련을 맺게 됩니다.

 

대화(對話) 이론에서는, 동적 정합-진리와 매우 비슷한 아이디어가 대화하기 참여자들 사이 ‘합의의 다양성’과 ‘불일치에 대한 합의’를 나타내고자 계발되었습니다. 대화란 개념의 교환을 의미합니다; 공적 공간에서 합의되거나 공유된 개념을 써서 사적 개념을 일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참여자들은 일관된 그리고 (조직화와 관련해서는 닫혀 있고 정보와 관련해서는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 자율적인 시스템들로 재귀적 방식으로 정의되며,공통의 관심을 지닌 동아리를 형성합니다; 즉, 개념들로부터 그 동아리는 산출되며 개념 비슷한 연산자들을 써서도 산출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달리 말해, P-개체들로 형성된 참여자들이란 결국 대화들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그러한 참여자들은 조직적으로 닫힌 ‘오토포이에틱’한 시스템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경계들을 정의하고 있으며, 마투라나, 바렐라, 폰 푀르스터 그리고 내가 속한 그룹에서 사용하는 용어-체계에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예를 들어, 마투라나는 ‘부분적으로 자율적인 그리고 상호작용하는 유기체들의 말하기’에 대해 언급할 때, ‘구조적으로 열린 그리고 조직적으로 닫힌’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조직적 폐쇄나 P-개체화는, 자체로, 해석학적 또는 동적 정합-진리 값을 갖습니다; 안정된 개념 또는 참여자 혹은 그 무엇이든, 그렇다면, 그 실존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류(類)의 정합의 실존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진리 값 외에, 발신측, 수신측, 재귀-준거, 그밖에 준거 값들을 갖는 것 또한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합의에 대한 정합-진리’는 격자와 같이 일렬로 놓이는 값들로는 표현되지 않습니다.

 

7. 차이들

 

단지 형식만을 나타내는 보기를 다루는 한, 상당히 많은 것들은 마름모꼴 격자 진리 값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심각하고 실제적인 목적들에는 최소한 귄터 논리학의 진리 값들만이라도 수용하는 더 복잡한 격자 구조가 필요합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앞서 지적했듯이 격자와 같은 선(線)에 의존하는 여론-진리는 정합-진리와 다릅니다. 이 두 진리의 일치는 아주 드물게만 성취되는 완전한 협정(協定)에서만 가능한 특이한 일입니다. 당신은 무언가 또는 여타 것들에 대한 내 사적 개념이 무언가 또는 여타 것들에 대한 당신의 사적 개념임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공적 영역에서 공유된 개념들입니다.

 

이 사안은 R.D. 레잉의 I.P.M.이나* 베이트슨의 다중 구속에서 보여진 유형의 합의들을 고려하면 훨씬 더 복잡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합의들을 수용 조정해야 합니다; 사안이나 사건에 관한 당신의 견해에 대한 내 견해, 그것에 관한 내 견해에 대한 당신 견해, 등등. 그 모든 것들은 완벽히 적법하며 다룰 수 있고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I.P.M.: Iterpersonal Perception Method의 약자로, 1966년 레잉이 계발한 두 사람 사이 서로의 실재라 할 수 있는 바에 대한 알아차림/실패, 이해/오해, 동의/불일치를 측정하는 앙케이트다. 각 이슈당 12개의 질문씩 60개의 이슈로 구성되며, 응답자는 각각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조망에서, 타자의 조망에 대한 자신의 조망에서, 그리고 자신의 조망에 대한 타자의 조망에 대한 자신의 조망에서 응답해야 한다.

 

여론과 정합(整合) 사이 또 다른 차이(差異)는 각각의 영역의 참여자들에 대한 정의에 의존합니다. (통상 고려되는) 여론의 경우, 참여자들은 선험적으로 (즉, 일반 원리나 혹은 임의로) 구별된 개체들입니다. 정합에서 참여자들이란, 조직적으로는 닫혀 있지만 정보에 있어서는 열려 있는, 자체로 한정된 P-개체들입니다. 또 다른 경우,그 개체들은 사람들일 수도, 지역/사회들일 수도, 정당/파벌들일 수도, 대표/의원들일 수도, 제정된 법/원칙들일 수도 있습니다. 개체들 구획하기에는 무수히 많은 방식들이 있다는 사실에 맞설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사정들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여론 시스템들에서, 구별하기를 행하는 이는 바로 관찰자 혹은 전통적 관찰 방식입니다. 정합 시스템에서, 구별은 (정합 시스템의) 하위-시스템의 밀폐로 생성된 경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지적한 것처럼, 여론 사건들과 정합 사건들은 구조에 있어 차이가 있습니다. 여론의 경우, 투표하기와 같은 ‘특정 여론 형성 시점’에 대한 담화는 합리적입니다. 정합성은 결단코 특정 시점 또는 정해진 기간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8. 주요하게 방향잡힌 유형에 대한 대화들

 

많은 사회적, 과학적 대담은 (형식에 있어서는 하나가 아닌) 변증법을 쓰는 유형에 속합니다. 참여자들이 있습니다. ‘테제’로 알려진 가설이 하나 제안되고 논의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합의됩니다.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통상 테제의 ‘부정’이 아닌) 반대쪽, 즉,‘반테제’에 대해 참여자들이 동의합니다.

 

논쟁, 대화를 거쳐야, 바로 이러한 전혀 엄밀하지 않은 뜻을 갖는 ‘합의’가 있게 되며, 변증법의 성과로 테제나 반테제들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이상을 버리는 합의가 있을 수도, 혹은 더 일반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합테제’를 (그 ‘합테제’는 차후 하나의 테제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창조하는 합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합의와 관련되며, 합의 그 이상으로 경계(警戒)해야 할 것은, 테제, 반테제, 그리고 합테제도 또한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증명이란, 내 생각으로, 어떤 유형이든 그 유형의 가설이 최소한 하나의 가능한 담론 분야, 세계(世界)에서 반드시 상응-진리 값을 갖고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분야는 온갖 합성물들과 수학적으로 우아한 하부-구조들을 갖춘 물리학일 수도, 또는 신화들에 대한 온갖 고상한 합리화를 동원한 부족 설화들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물론, 그 분야란 것이 다소 지루하거나 황폐해진 분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변증법적 대화는, 정합-진리 값이 상응-진리 값과 견고하게 결합되는, 한층 더 확실한, 사례입니다. 그러나 상응-진리는, 좀체 모든 분야들에서는 아니지만,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가능한 분야들에서 증명과 관련됩니다.

 

9. 민주주의와 다시 방문한 과학

 

에스키모 의회의 운영은 진정으로 민주적인 시스템에 어울리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의 패러다임입니다. 그것은 대화를 수행하는 것과, 종종 변증법적 논쟁을 수행하는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 운영이란, 실행 그리고 사실, 대개 국부적 사실과는 ‘빈번하게’ 관련짓되, 원리, 원칙의 일반적 사안에 대해서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관련짓습니다. 생산적 대화를 주시하는 한 가지 방식은, 폰 푀르스터가 최초로 진술한 용어로, ‘자기-조직하는 시스템’과 같은 것임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또한 과학이나 (정리들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고안하는 것으로서) 수학, 혹은 예술에서 최고의 창조적 메커니즘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여론-진리에 바탕을 둔 (그리고 상응-진리를 척도로 지지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메커니즘과는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정합 시스템과 여론 시스템을 혼동하는 것은 민주적 이상(理想)을 손상시키기 쉽습니다. 여론은 불법적이지도 심하게 왜곡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경우들이 있다할지라도,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론이 그리고 그 아래 깔려 있는 전제들이 정합성에 문제가 있을 경우, (분명, 어느 정도 정형화와 안정성은 있어야 하지만) 부당한 것들이 고착되고 규범이 타락하는 심각하고 중대한 위험이 있다는 것은, 고민거리입니다. 내가 고발했던 그리고 이러한 혼동 탓으로 야기된 민주주의에 대한 이은 정말이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짓이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는 이들 입맛에 맞추는 짓입니다. 또한, 말이 나왔으니, 그것은 주류 테크놀러지에 순응하는 과학의 포기이기도 합니다.

 

10. 메커니즘들의 양립가능성

 

(불가피한) 위험 또는 그것을 야기시는 것은 여론에 있지 않습니다. 종종 여론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것입니다. 인구가 많거나 제기된 문제들이 긴급할 때 진짜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자주 당연시 합니다. 여론은 관리 또는 행정에 수반되는 부담을 덜어주는, 그리고 정부(統制)에 공정한 형식을 제공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진짜 위험은 한 메커니즘을 다른 메커니즘으로 혼동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론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투표일 결정과 같은) 여론 과정을 발동시킬 정당한 근거는, 그 과정이 여론 형성의 일정한 틀로 인정되고 있어야 하며, 또한 실제 논쟁과 정합성 평가 그리고 그 사이에 있어야 할 것들이 장려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론을 정합 그리고 민주주의로 혼동할 경우 그 과정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11. 그것만이 유일한 최선책인가?

 

내 견해로, 평가되는 논의에 정합성이 편재(遍在)될 수 있다면, 우리는 여론으로 결정내리는 것보다 십중팔구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정보의 우위, 지식 보급, 컴퓨터 사용, 통신 교통수단 그리고 사회에 갖추어진 그 비슷한 것들로 인해 실제적이자 현실이 됩니다. (이제까지 터무니없이 비싸고 신뢰할 수 없었던) 이 모든 수단들은 비교적 싼 것들입니다. 이들 자원을 (그저 데이터를 주고받기보다는)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사용함으로써, 더욱 더 분할된 사회들을 연루시키면서, 더 큰 규모의 합의를 지속적으로 이끌어 내거나 정합성을 지속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교육에서, 캐틀린 포사이스; 경영/관리 조직화에서, 마이크 로빈슨; 활발하게 추구하고 있습니다.

 

12. 테크놀러지를 넘어

 

테크놀러지는, 현재까지, 로빈슨이 ‘사회들 사이 대화’라 칭한 것을 북돋고 지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입니다. 적어도 다른 하나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방식으로, 대화에서 생겨난 지식습득과정(knowing)과 공적-영역에서 공유된 그러한 개념(Knowledge)들을 재현하는 과정(representing)을 이해, 촉진시키고 다루는 방식입니다. 이 모든 것에는 (실존하는 바로) 상당한 이론적 작업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생겨나는, 은유로서, (수학적 대칭이 상당히 풍부하고 상당히 시적인) 그러한 아름다운 비유, 알레고리, 이야기 그리고 그림들의 창조를 위한 배려를 높이는 일입니다.

 

     

 

 

이 논문은 Communication &Cognition, vol.23, nos 2-3.에 최초로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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